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기 중인 1933년 1월과 1935년 여름 동안 연방 정부는 대공황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일련의 노동 보조 사업을 실행했다. 몇몇 예술가들에게도 공공미술사업(Public Works of Art Project)이라는 명목으로 일자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토목사업청장인 헨리 홉킨스가 주장한 이 사업은 초기 연방 보조 제도의 전형적인 특징처럼 단기간에 그쳤고(사업비는 네 달만에 고갈됐다.) 정치적 논쟁의 표적이 됐다. 뉴욕에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행운아들은 도시의 동상이나 기념물을 청소하고 보수했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자 이들은 다시 구호 대상자 목록에 올라야 했다.
1935년 여름 홉킨스는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좌절에 빠진 미국을 다시 되살릴 수 있는" 대규모 구제 사업을 위한 공공사업진흥국(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을 설립했다. 홉킨스는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못 하고 구호 대상이 돼야 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동정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경멸받았다."라고 말했다. 6년 동안 WPA는 20억 달러를 들여 평균 210만 명의 사람들을 고용했으며 거리의 낙엽들을 긁어모으는 일부터 비행장 건설까지 거의 25만 개에 달하는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했다. 토목사업국에서 했던 것처럼, 홉킨스는 돈이 예술가들에게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에 따라 이 기간 동안 WPA 자금의 5퍼센트(4600만 달러)와 고용인의 2퍼센트(3만 8000명)가 창작 예술 및 공연 예술에 할당됐다.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홀저 캐힐(Holger Cahill)이 이끄는 연방예술사업(FAP, Federal Arts Project)이 있었으며 그 밖에 연방음악사업, 극단사업, 작가사업이 존재했다.
뉴욕에서는 첫 4개월 동안 약 1000명의 예술가들이 FAP사업에 고용됐다. 화가들은 규정에 의해 벽화와 이젤 부문으로 나눠졌고 일정 심사 기준에 따라 나뉘어졌다. 이 심사에 의해 예술가들은 "서툰, 보통의, 숙련된, 전문적인" 수준으로 분류됐으며, 등급에 따라 임금이 결정됐다. 미술계의 전통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은 사업 과정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 서로 맹렬히 경쟁했다. 대부분 전통주의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긴 했지만 버고인 딜러(Burgoyne Diller)와 몬드리안의 제자인 해리 홀츠먼(Harry Holtzman)이 이끄는 소수의 추상미술가들은 아실 고르키, 스튜어트 데이비스, 바이런 브라운, 얀 마툴카 그리고 일리야 볼로토프스키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벽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연방예술사업의 효과는 예술가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예술가들은 관료 규정을 피해갈 수 있도록 서로 도왔으며, 임금과 일을 할당하던 WPA 사무실은 미술가들에게 바와 커피숍을 갖춘 만남의 장소가 됐다. 더 이상 시간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전임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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