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리뷰 1에 이어서 책의 후반 부분 18세기 신고전주의부터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의 기억하고 싶은 점들을 담아보았다.
11 혁명의 선전가에서 독재자의 궁정화가로
프랑스혁명을 앞두고 이미 예술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예술가와 감상자가 예술품에 대해 새로운 도덕적 교훈을 요구하고 정치적인 주장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은 오락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들을 교육해 더 높은 이상을 갖도록 자극해야 했다. 엄격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 명료한 윤곽, 그리고 선이 부각되는 양식으로 표현된 '신고전주의'라 불리는 예술 양식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다.
혁명이 일어나자 왕밑에서 일하던 예술가들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도 있으나 처형된 자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다비드처럼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가 급진파의 몰락 후 은둔해 있다가 나폴레옹이 지배하자 다시 관직과 명예를 얻은 자도 있었다. 다비드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그가 걸어온 예술적 행로는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는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현대적 관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다비드는 예술과 정치의 분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예술을 통해 프로파간다를 실천해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예술가로서 조국 프랑스에 봉사하려 했다. 그 대상이 왕이냐 독재자냐 황제냐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12 향수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고통_낭만주의
낭만주의는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정신 사조였다. 감성 중심의 초감각적이고 종교적인 태도, 열띤 자연 예찬을 표방했다. 화가들은 고대와 르네상스의 대가들에 작별을 고했다.
고전주의의 이상은 스스로를 완전히 통제해 감정보다는 이성과 역사적 사명을 우선시하는 데 있었다. 이와 반대로 낭만주의에서는 자연과 무절제한 운동이 주도적이었다. 낭만주의 화가와 작가는 감정의 고조를 지향하며 섬뜩한 주제를 찾아 나섰다. 제리코는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시체를 묘사함으로써 대중을 도발했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 이에 못지않게 도발적이었다. 전통적인 성향을 지닌 예술가들은 이러한 도발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일반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아시아와 해외의 이국적인 문화가 신비한 마법, 생명력, 자연과의 결속력, 그리고 성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회화에서 동양 세계가 유행한 이유는 이곳의 역사와 종교 그리고 성적 환상이 결합되어 신비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13 예술가, 시장에 종속되다
예술 비평은 대중과 예술가 사이에 위치한다. 신문에 발행되는 전시회 비평은 예술을 비교적 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이 많은데 이는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예술가들의 독립성이 19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은 다양한 주문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한편, 여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여론의 주목받기 위해 시선을 압도하게끔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에는 아직 영화 산업도 없었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에로틱한 그림의 대량 생산도 이뤄지지 않을 때), 회화는 역사적 상상력과 에로틱한 판타지, 관음증 심리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살롱에서는 화려한 대형 작품으로 관람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예술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예술가와 비평가들에 의해 천박한 오락물로 매도되었고,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예술에 대비되어 평가절하되었다.
바로 여기서 이미 일반 대중과 예술 전문가의 분리 현상이 확연히 드러나며 이 분리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14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_리얼리즘
사실주의는 19세기에 나타난 특정 예술 유파를 일컫는다. 이 유파는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예술은 전통적으로 담당해왔던 기능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있었다. 성화와 도덕적 교훈화, 역사화 등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통했다. 사실주의는 자기만의 세계로 물러나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형식적인 문제만을 중시하고 내용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미의 이상과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소망이 강했다. 바로 이 점에 반기를 든다. 언뜻 생각하면 사실주의는 당시의 예술 발전에서 오히려 퇴보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실주의가 예술 발전에서 중요한 단계로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주의의 주인공은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이다. 그는 농부와 노동자의 얼굴이나 힘들게 일하는 모습 등을 묘사했는데, 이전의 어느 누구도 일상적인 모습을 그렇게 꾸밈없이 묘사한 화가는 없었다. 파리의 시민 계급이 이 그림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쿠르베는 고대 신화와 어린 동방 판타지를 탐닉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예술은 더 이상 위안을 주는 매체가 아니었고, 오히려 관람객에게 충격을 주어 예술 작품을 보는 습관적인 태도를 깨뜨리는 수단이어야 했다. 예술 그 자체가 그의 공격 대상이었고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예술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술을 예술적 수단을 통해 공격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초월적인 세계를 포기하고 진부한 대상물의 세계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원했던 충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런 충격을 통해 대상의 표현에 관한 단순한 질문을 넘어서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의 기원>이나 다른 그림을 그릴 때도 사진을 다양하게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재현 기술인 사진과 회화의 경쟁은 쿠르베의 예술에서도 일찍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15 아름다움은 빛에 있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2년>은 경쟁자 사진이란 장르에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서 거울은 250년 전에 벨라스케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네에게도 예술 그 자체를 그림의 주제로 삼는 도구였다. 또한 쿠르베와 마찬가지로 마네에게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모사하는 것은 더 이상 예술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네가 거울을 이용한 목적은 거울에 나타난 움직임을 통해 시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담한 실험 정신으로 사진이 대세를 이루는 세상에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 셈이다.
이 그림이 제작된 1882년에 개개의 동작을 연속적으로 찍는 크로노포토그래피가 개발되었다. 이 기법으로 연속 사진들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탄생했다.
19세기 예술가들: 황제와 왕 제후,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이 그림을 주문했던 시절은 종말을 고했다. 이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었고, 예술가가 된 다음에는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재능과 경제력, 사회적 인맥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되었다. 그 시절 예술가는 당대 예술을 주도하는 규칙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가치 규범도 깨뜨리려 한다. 이 거부는 19세기와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특징이 되었다.
17세기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의 삶과 19세기 말 예술가들(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시민 관람객의 기호에 맞춘 그림을 그려야 했던 대다수의 화가들)의 삶을 비교하면 놀라운 결론이 나온다. 즉 수많은 규칙과 궁정의 위계질서에 속박된 궁정화가가 그러한 속박에서 벗어난 근대의 예술가들보다 오히려 큰 예술적 자유를 누린 것이다.
19세기 말 화가 되려는 여성들의 숫자 늘어났다. 그러나 여성에게 예술에 관한 수동적인 지식만이 권장되었고 직업적인 예술 활동은 금지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여성이 미술계에 진출하는 손쉬운 방법은 모델을 서는 것이었다.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965~1938)은 모델로 '몽마르트르 언덕의 뮤즈'라 불리며 수많은 화가들과 관계를 맺었다. 18세 때 아들을 낳은 후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성공한 화가로 인정받아 유명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미술사에서 성공을 거둔 여성 화가가 거의 없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입지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 <푸른 방, 1923년>
16 예술은 대상을 모사하는 것 이상이다
예술을 혁명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간주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토 프로인틀리히만(Otto Freundlich, 1878~1943),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šek Kupka,1871~1957),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등
17 예술 투쟁이 예술의 일부가 되다
이 투쟁의 포문을 연 사람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86)이었다. 뒤샹은 관람객의 찬사를 받기 위해 혈안이 된 예술계의 단조로운 시스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예술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감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과학적인 가치를!"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는 뉴욕 전시회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1912년>로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된다. 1915년에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후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유화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 온갖 생활용품을 활용하는 예술 실험이었다. 뒤샹은 영원히 지속해온 예술 유희에, 다시 말해 예술 양식과 예술 기호에 무엇인가를 대립시키고자 했다. 즉 그는 반예술 이긴 하지만 예술의 테두리 안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작품들은 지적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되고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가는 차라리 책을 쓰는 게 나을 것이었다.
뒤샹은 생활용품이긴 하지만 만들어진 목적과는 다르게 미술 작품이 된 것을 '레디메이드 Ready_mades'라 불렀다. 이 작품들은 후에 '개념 예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레디메이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품이 아니라 예술가가 사전에 기획한 아이디어이다. 그의 <샘, 1917년>은 예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바로 '관람객'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이 예술로서 인정받으려면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여건은 미술관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전시하는 대상물이 관람객의 시각에 의해 비로소 예술이 되도록 구상한 것이다.
18 '검은 사각형'에서 '붉은 깃발'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는 1915년 <검은 사각형, 1912년>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예술의 독립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내용이나 메시지를 담지 않으며 지배자나 신에게 봉사하지도 않는 비구상 회화는 바로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 말레비치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추상 예술의 선구자에 속한다. 칸딘스키와 차이점은 그의 그림은 비구상화이며 추상 예술로 완전히 전환했다는 점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보며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 해, 명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콘이나 종교화와 유사하다. 그는 구성주의(미술과 건축에서 일체의 재현을 거부하고 기하학적 추상 형태를 바탕으로 형상화하는 양식)의 선구자로 통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서유럽 예술은 그의 예술 경향을 추종하려 했다. 당시 <검은 사각형>은 현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혔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람객에게는 더 이상 큰 인상을 주지 못한다.
19 아방가르드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에 대한 대답이었다. 다다이즘은 비록 단명하고 말았지만 이후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6년 취리히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취리히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예술가와 지식인의 도피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다양한 활동 들을 보였는데, 그들의 공통된 점은 모든 예술 전통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무의미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은밀한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
다다 운동이 도전적으로 시도한 다양한 예술 형태는 20세기 후반에 재발견되어 현대 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20 맺는말_파괴와 혁신
현대미술에 대한 거부감은 적인 추세인데 이는 예술각들이 대상을 기형화하여 해체하고 파괴함으로써 대중의 미의식을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대중의 미의식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와 살롱에 의해 오랫동안 길들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이상주의적인 인간상이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현대 예술에 대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미의식은 조화를 추구하는 속성에 있다. 우리의 이러한 판단에는 특정 신체나 얼굴을 조화롭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생물학적 사실도 한몫을 담당한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인간이 추구해온 예술은 이러한 보편적인 미의식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현대 예술에서 미란 생물학적인 이상형과 눈요깃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시각과 사유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작품을 주목하고 또 그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할 때 비로소 미를 느낄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예술가들은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술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생동감을 얻었다. 결국 사람들이 논쟁을 예술의 생산적이고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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