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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의 먼지/미술방

미학과 미술 / 박일호-3

by 책방의 먼지 2019.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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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미술 / 박일호-2  에 이어서 19세기 이후 사실주의에서 모더니즘 미술까지의 내용 중 인상적인 부분을 정리해보았다.

 


<형식으로서 예술>

  • 현실과 빛과 색의 묘사-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실주의자인 쿠르베는 그림의 창작이란 현실의 직접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추상적인 미의 이념보다 아름다운 대상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목표로 해야하며,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고전주의에서 추구한 미의 형식이나 규범이라든지 낭만주의의 상상력이나 감정에 의한 표현이 아니라 현실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타내야 한다는 것.) 이에 쿠르베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상주의는 빛과 색의 묘사라는 그림의 방법을 그림의 주제보다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후 현대 미술에서 작품의 형식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미술은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형식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적인 세계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작가는 세잔이 있다. 세잔은 현대미술의 다양한 형식 실험들을 불러일으켰고, 형식주의 예술론의 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 형식론과 모더니즘 미술

모방론이나 사실 세계에 묶여 있던 미술을 해방시켰고, 선,색,면 등을 대상의 재현 수단이기보다 작품의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한 점이 고흐, 고갱, 세잔의 공통점이다. 형식으로 향한 미술 작품들은 점점 더 현실 세계에서 멀어졌고, 입체파 야수파를 거쳐 추상미술로 이어진다. 추상미술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영향력을 나타냈던 표현론도 한계를 드러낸다. 한편, 형식이 강조되면서 20세기 현대 미술을 지칭하는 말로 '모더니즘 미술'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현대 미술과 모더니즘 미술은 19세기 말 후기 인상주의에서 시작해서 추상미술 거쳐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새로운 양식들을 가리킨다. '모던 아트'를 번역한 현대 미술이란 말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이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말에는 새로운 미술 양식들에 담긴 사고가 강조되고 있다. 모더니즘은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을 포함한 20세기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새로운 예술 경향을 뜻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예술론으로 형식론이 주목받게 되었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의 의미와 형성 배경을 어떻게 설명할까? 모더니즘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새로운 시대 의식인 모던한 삶의 태도나 정신이 담겨 있는 경향을 말한다. 또 산업화된 사회에 대한 반발인 '예술을 위한 예술'운동에서 비롯된 예술 형식의 순수성과 자율성의 추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모던'이란 말의 의미는 특정한 전 시대와 대비된 새로운 시대 의식이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특정한 시대를 전제로 한 새로움이란 뜻의 모던이란 말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것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진보관에 의해서였다. 자연의 법칙성을 강조한 계몽주의는 사회 각 분야에서도 자연 법칙과 같은 내적 논리가 있다는 생각을 낳았고, 각 분야의 전문성의 추구로 이어졌다. 예술에서의 모더니즘도 마찬가지로 자체의 법칙성을 갖는 하나의 전문적인 영역으로 여겨졌고, 예술이 삶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세계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자율적인 세계가 예술 자체의 순수한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형식론에 주목해, 형식론은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근거를 이루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진보관에 의해 모더니즘 미술의 아방가르드 개념도 탄생했다. 예술가들이 모험을 무릅쓰며 새롭고 실험적인 형식을 개척하고, 미술 양식의 진보를 이룬다고 여겨졌고, 이러한 아방가르드 정신을 바탕으로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다양한 형식 실험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 미술을 묶어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미술품은 현실 세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작품 자체의 형식 세계로 향해 나아갔으며, 미술 안에서도 회화와 조각이 자체의 서로 다른 전문 영역을 추구하게 되었다.  

 

모더니즘 미술은 자율성이라는 원리에 충실하게 따르고 형식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삶을 떠난 공허한 형식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형식론에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예술의 가치가 형식에 있다는 주장은 옳았지만 순수한 형식을 위해서 예술을 삶의 내용과 구분지은 점에서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삶의 세계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예술 작품의 형식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주목하게 만든 것은 예술 외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내용이며, 예술가들이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예술정의 불가론과 예술 제도론>

  • 비트겐슈타인의 분석 철학과 분석 미학

철학적 탐구의 핵심을 언어에 두고 있는 분석 철학은 언어 철학으로도 불리며,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유행했다. 언어란 우리의 경험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지각적이며 개념적인 관점을 제공하기도 하고,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철학이 세계나 인간에 대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 정보나 사실의 발견은 과학의 일이며, 철학은 이런 학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서 의미 있고 타당한 지식 체계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후기 사상인 사용 의미론을 살펴보면 언어는 단일한 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고, 삶에서처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언어 행위란 삶을 지배하는 규정이나 관습인 삶의 양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사용 의미론을 바탕으로 분석 미학이 등장했다. 분석 미학은 미학이 예술 현상보다 그것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예술이나 예술에 관한 개념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의미를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일이 미학의 과제라는 것이다. 미학의 물음이 '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이란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현상에서 본질을 찾고, 모방, 표현, 형식 등으로 정의 내린 지금까지의 예술론들이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예술정의 불가론을 주장한 웨이츠, 예술계 개념을 말한 단토, 예술제도론을 주장한 디키를 들 수 있다.

 

  • 다원주의 예술-단토

단토에 따르면, 재현과 모더니즘의 내러티브가 종말을 맞은 이후 예술은 특정한 목표나 과제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고, 예술의 다원주의 시대가 열렸다. 미술사를 이끌어 가는 특정한 방향이 없어졌으며, 모든 양식이나 작품들이 동등한 가치와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나 진리나 형식 등과 같은 전통적 기준에서 벗어나야 하며, 개별적인 작품들의 다양한 목표와 방식들에 따라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예술 작품도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하나의 언어 게임이며, 작품들의 구체적인 목적과 방법에 의해서 사용되는 의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들의 삶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의미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단토는 오늘날의 다원주의적 예술 상황을 옹호하고,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조의 길을 열어 주고 있다. 하지만 단토의 예술계 개념에는 어디까지를 예술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담겨 있지 않다.

 

  • 예술계와 예술 제도론

디키가 주목한 것은 예술이란 단어가 제도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계에 의해서 예술이라는 자격이 부여된 것, 즉 예술 작품을 중심으로 그것을 창조하는 예술가, 비평과 해석을 내리는 평론가나 이론가, 작품이 소개되는 공연장이나 전시관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로 맺어지는 세계가 있고 이 세계가 사회 속에 일종의 제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디키의 예술 제도론에는 많은 반론들이 제기됐다.

예술 제도론은 뒤샹이라는 예술가가 소변기를 예술로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예술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뒤샹의 <샘>이 갖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뒤샹의 <샘>이 등장했던 때에 초현실주의 그림도 있었고, 워홀의 팝 아트가 등장했던 때에 저드의 미니멀 아트나 뉴먼의 색면회화도 있었다. 미학은 이런 작품들이 서로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 그리고 그중 어떤 점이 이것들을 예술이 되게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도 제시해야 한다. 예술의 폭을 넓히는데 어떤 기여를 했으며, 우리들의 삶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정의를 분류적 의미로만 제한한 디키뿐만 아니라, 웨이츠나 단토에게서도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찾을 수가 없다. 이들은 이런 것들은 예술 비평이 해야 할 일이며, 미학이 할 일은 비평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을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의 과제를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일이라고 본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의해서 분석 미학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물음들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예술의 본질이나 작품의 속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향해야 한다. 공허한 형식 이론으로 비판받고 잇는 형식론에서는 보지 못한 인간의 삶이나 세계와 예술의 관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로 인한 예술의 특성은 무엇인지? 현대 철학의 다른 두 경향인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세계 속의 실존적 삶과 예술>

  • 현상자체로-후설

현상학과 실존주의는 정신의 지나친 신뢰가 인간의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특성을 희생시켰다고 보았다. 전통 철학이 인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하고, 삶과 동떨어진 철학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후설에 의해 시작된 현상학은 현상들을 객관화하고 일반화하는 자연 과학주의에 반대하고, 현상 자체로 돌아가서 그 성격을 밝히고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후설(1858~1938)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문화가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 과학주의의 영향에 의해서라고 한다. 과학 발달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들이 정신의 영역에도 획일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설의 전기 현상학에서의 인식론은 객관적 진리의 세계가 있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가 아니라 주관과의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의 본질이나 진리의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상상력을 통해서 대상을 수많은 방향으로 자유로이 변경하고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 후, 그것들이 겹쳐지는 불변의 공통적인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후설의 후기 중심 사상인 생활 세계는 모든 이론과 논리에 앞서 우리 감각 앞에 최초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뜻한다. 나아가 그는 생활 세계 속의 질서가 의식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신체의 체험을 통해서 지각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후설의 현상학을 예술에 적용하면 새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후설의 전기 현상학을 예술 작품에 적용한 철학자 잉가르덴과 생활 세계 개념을 근거로 예술작품을 설명하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가 있다. 이들은 예술 작품의 미적 경험이 실제적인 관심을 떠나 무관심적으로 작품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상적이며 이론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현상을 대하자는 현상학의 방법에 적합하다. 분석 미학과 달리 예술 작품 자체에 주목하고, 그 특성들을 밝혀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예술 작품 자체로 돌아가자고 해서 작품의 형식만을 주목하지는 않는다. 형식에 담긴 구체적인 삶의 경험과 관련된 풍부한 내용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형식론과도 차이점을 나타낸다. 

 

  • 존재자로서 예술 작품과 존재의 드러남-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세계 속에 있고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세계와 인간이 불과분의 관계에 있다. 다른 현존재인 타인을 향해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주변의 사물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며, 그들과 공동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이런 속에 본래의 자기 자신이라는 모습은 가려진다. 따라서 인간이 참된 실존을 통해 자기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현존재의 근거인 무를 받아들이고 본래의 자신을 찾아 참된 실존을 이루게 될 때, 가려졌던 '존재'가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참된 실존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이미 정해진 본성이나 본질이 없는 잠재성 가능성이며, 스스로 그 무엇이 되어 가면서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런 삶은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창조 행위나 자기 주장을 할때라든지 모든 가치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인식할 때에 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이 그런 자유로운 행위의 모범적인 경우가 될 수 있고, 예술에서 인간 실존의 본래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신체와 세계의 공존에 의한 회화-메를로 퐁티

신체의 지각을 통해 과학 이전의 (개념이나 이론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인 세계로 향하려는 메를로 퐁티의 시도는 그의 예술론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예술이 필요한 이유로는 과학이 망각한 우리들의 삶의 원천과 접촉하게 해준다는 것을 들고 있다. 메를로 퐁티는 문학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보다는 작가가 특정한 관점이나 태도를 통한 자신의 말을 하고, 음악은 세계 속 존재들의 동요나 성장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보다는 그것들의 윤곽만을 암시할 뿐이기 때문에 문학과 음악보다 회화가 세계의 원초적인 의미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게 해준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한 장의 그림은 어떻게 그려질까? 메를로 퐁티는 화가의 주관을 통해 자의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재현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세계-에로-존재'인 화가가 신체의 실존을 통한 지각인 신체와 세계의 공존을 그림 안에 담기게 하는 데, 이 과정을 화가의 신체와 세계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화가가 세계를 '봄'은 신체의 자발적인 '움직임'과 융합해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눈의 '움직임'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봄'은 눈의 '움직임'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고, 눈의 '움직임'에 예정되어 있다. 눈으로 '봄'은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라는 말이고, 자신을 세계를 향해 열어 놓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눈으로 보는 가시적인 세계는 눈의 움직임의 세계와 동일한 존재를 구성하게 된다. '봄(vision)'과 '움직임(movement)'이 서로 융합을 이루고 신체는 그 융합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 세계가 신체 안으로 들어온다-세잔과 클레

메를로 퐁티가 자신의 예술론의 관점에서 주목한 대표적인 화가는 세잔과 클레이다. 

세잔은 한 장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서 100번의 작업을 했고, 한 장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150번이나 앉혀 놓았다고 한다. "세계가 신체 안으로 들어온다" "자연은 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세잔이 인상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곧 결별한 것도 인상주의가 눈으로 들어오는 지각의 과정인 '봄'보다 눈의 순간적인 인상에 치중해서 대상의 구조나 양감을 상실했다는 점에 회의를 느꼈기 떄문이다. 세잔의 작품 <사과가 담긴 광주리>를 보면 원근법적인 방식에서 볼 때, 이상한 왜곡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세잔이 대상 사물에 충실한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눈을 계속 움직이면서 지각한 것들을 종합해서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사물의 지각 과정을 충실하게 담아내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를로 퐁티의 생각을 비재현 미술에 적용하면 클레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그림의 창작이란 자연의 원초적인 창조성을 닮아야 하며, 그림 안에 자연의 생성 원리를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를로 퐁티는 화가들이 신체 안으로 들어오는 세계의 요소들을 스타일(화가가 세계의 '봄'을 통해서 자신 안에 구성해 놓은 신체도식)을 통해서 그림의 부분들로 자리 잡게 하고, 형식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지각 속에 흩어져 있는 의미들을 통합하고 변형해서 뚜렷하게 만드는 지표로 사용하고, 이렇게 해서 화가의 스타일이 그림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때 형식은 모더니즘 화가들이 추구하는 형식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형식을 세계와의 모든 접촉에서 벗어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 실존을 통한 의미 추구로서 미술-사르트르, 해리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예술을 설명한다면, 예술이란 세계를 향해 자기를 내던져 의미를 구하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창조는 오랜 생각 끝에 나오는 의도적인 활동이며, 예술가의 선택에 의한 기획이라는 것이다. 

해리스(K.Harries, 1937~)에 따르면 19세기 말 이후 전개된 모더니즘 미술은 플라톤적인 인간관과 기독교적 인간관이 무너진 후,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자각한 근대적 사고까지 벽에 부딪친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고대 미술은 플라톤이 제시한 정신에 치중한 인간상에 의한 것이었고, 중세 미술은 신에의 헌신을 통해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인간 이성의 합리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 고전주의였고, 인간을 세계의 척도로 본 관념론적 사고에 의해서 낭만주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예술들에 의해 세계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았고, 인간이 의미를 구하려 했던 기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 미술은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명료함과 의미를 추구했던 인간의 시도가 벽에 부딪친 상황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해리스는 두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서 세계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의 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항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를 내버려 두면서 존재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런 두 가지 실존 방식을 통해서 해리스는 모더니즘 미술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세계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향한 예술에는, 형태들을 해체하고 변형하고 왜곡하는 입체파와 일상적인 사물의 위치를 뒤집어 놓은 초현실주의, 그림의 위 아래라는 기본적인 방향성마저 무너뜨린 추상화 방식이 이에 해당된다. 급기야 세계를 향한 부정의 시도는 예술가의 자유를 위해서 예술 자체도 부정하는 것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그 어떤 이론이나 미학도 가치 추구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다다는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인 세계 자체의 드러남은 인간이 결코 정신적인 삶을 살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이 이성에 있지 않다는 다원주의나 프로이트의 관점을 새로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고 있다. 정형화된 형태나 구조를 피하고, 규칙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려 한 추상 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의 미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두 개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근거로 한 미술들에 의해서 세계의 의미가 드러났는가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는 기획이 나타나는데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서 세계와 거리를 두는 방법을 취하고, 사물 자체의 드러남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팝 아트에서 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들을 예술 작품으로 제시하는 거리두기 방법이 그 예다. 일상적인 세계에서 통용되는 생각이나 관습을 부정함으로써 그것들을 사물 그 자체로 남게 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모더니즘 미술의 다양한 시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세계를 향한 끝없는 의미 추구로서 예술이라는 기획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예술이 삶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느냐라는 물음에는 여전히 의문이 따르겠지만, 세계를 향한 예술가들의 실존적 삶의 내용들이 담긴 작품들은 계속될 것이고 이런 점에서 실존주의적 관점에 의한 예술론은 형식론의 공허한 형식을 넘어 우리들의 다양한 삶에 접근하려는 또 다른 방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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