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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의 먼지/미술방

예술은 무엇을 원하는가 / 크리스티안 제렌트, 슈테엔 키틀 -1

by 책방의 먼지 2019.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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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자주 가는 편이다. 동네는 아니지만 버스를 타고 조금 가면 있는 곳에 대형 헌책방이 들어서서 구경 갔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이다. 제목만 보고 겉표지도 마음에 들어 집에 들여놓았는데 꽤나 괜찮은 책이었다. 제목은 예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지만 내용은 고대부터 20세기까지의 미술사를 다루고 있다. 기존의 유명한 미술사 서적들 곰브리치나 잰슨의 서양미술사 책들을 읽다 놓치기 쉬운 간략한 정리가 이 책을 통해선 가능하다. 쉽게 쓰였지만 예술가와 관람자, 사회와의 영향 등을 고려하며 시대마다 한두 명의 작가를 중심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깊이감이 있어 좋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끝에 가면 미술에 대한 얕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괜찮은 지식들을 얻게 되는 책이라 유명한 미술사 책들보다 미술사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오히려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책 내용들을 장별로(총 20장) 담아보았다.

 

01 루시와 파블로 피카소_예술의 과거와 현재 

예술은 유희 충동과 같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긴 하지만 항상 사회와 연관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예술 창작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할 수도 있었다. 예술이 순수하게 자기 목적만을 추구한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의 발전사를 서술할 때 대개 예술이 마치 항상 자유를 추구해왔고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이 자유를 얻었다는 듯이 설명한다. 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전개되어오지 않았다. 예술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파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림은 완성된 후에 한동안 공개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을 관리한 갤러리스트는 일반 관객은 피카소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림을 섣불리 공개했다가 피카소의 명성이 손상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무당들의 가면과 그림, 그리고 주술 양식은 습관적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영적인 예배 의식의 구성 요소였다. 당시에는 이 그림과 유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현대 예술에서는 설명과 해설이 대중의 예술 감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자유를 누리는 예술도 설명과 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02 그림의 사명

그림으로 형상을 묘사하는 일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대략 600년에서 1400년까지 지속된 중세시대에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그림을 볼 수 있는 곳도 교회나 궁정뿐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중세 기독교인들이 숭배했던 그림을 '이콘(성상)'이라 부른다. 성상의 대상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기독교의 성인들이다.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어 성공을 거두게 된 데는 성화가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다른 그림들과 이콘을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신자들이 단순히 모사된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신적인 것 자체로 숭배한다는 사실이다. 

 

03 신과 나_예술가의 역할

중세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업을 이어받아 금세공하는 자, 장식가, 석공, 문장 화가로 일한 수공업자들이 그 시대의 예술가였다. 중세의 그림이나 조각은 대개 고정된 주제와 규칙을 따랐으며, 주로 기독교 교리를 구체화해서 감상자에게 종교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중세 후기에 이르러 일부 예술가들이 익명의 공예가 위치에서 벗어나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조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인물들을 묘사할 때 화석화한 것처럼 생동감 없이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과 일상생활을 관찰해 자신이 직접 본 대로 그렸다. 명암의 차이를 이용해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사실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에 이르러 예술은 점차 일상적인 주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중세시대 화가들은 후세의 그림과 비교하면 인물이 생동감이 떨어지고 공간의 원근법적 묘사가 없는데 그들이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물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했고, 인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크기만 다르게 그렸다. 중요한 것은 사실적 모사가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의 전달이었다.

 

 04 인간이 예술의 중심이 되다_르네상스

이탈리아 도시들이 부유해지고 점차 독자성을 키워나간 데 힘입어 예술가라는 직업이 전문화되고 예술의 발전 속도도 빨라졌다.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던 새로운 도시국가들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궁정을 짓고 벽화와 문장으로 치장했다. 예술가들은 늘어난 그림 주문으로 인해 더 이상 종교화만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치며, 대략 1400년부터 전개된 르네상스 시대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예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짐으로써 단순히 자연 모방에 그치지 않고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고대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신성한 조화를 강조하는 르네상스 예술 계획과 일치했다. 따라서 인간의 나체도 종교화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가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가업으로 아틀리에를 물려받으며 전승되어온 예술가 집안의 전통이 종말을 맞이하게 되고 예술적 아이디어와 이를 수행하는 기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수세기 동안 예술과 그 예술을 수행하는 기법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등이 이 시기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보스의 작품은 후세에 이르러 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오늘날까지도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단지 그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고 성실하게 노력했다는 점만을 강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누린 예술적 자유는 주문자들의 정신적 역량이 그만큼 성숙했기에 가능했다. 

 

05 수공업자에서 신의 경지로

알프스 산맥 북쪽에서는 반 에이크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수공업자 조합의 규칙에 따라야 했다. 반대로 이탈리아에서는 예술가들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술가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였다. 그는 생존 당시 이미 '신의 경지에 도달한 대가'로 불렸다.

당시 예술가들은 부분적으로 자유를 누리긴 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여전히 권력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06 광기냐 신의 의지냐?_근대의 성상 파괴

1500년 전후의 시기를 시대 전환기라 말하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 시기 직전에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고 국제 무역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종교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과학과 기술, 경제는 크게 발전했고 신앙심도 오히려 강화되었다.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로 인해 예술 활동이 위축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로부터 독립한 예술은 다루는 주제가 점점 세속적이고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나라 전체가 획일적으로 통치되었지만, 이제는 주문자가 다양해져 예술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07 전통과 혁신의 교체

르네상스가 전개되면서 조화로운 신체 표현법이 쇠퇴하고 점차 새로운 유형의 표현법이 나타났다. 이제 예술가들은 신체 비율을 늘이고 포즈도 인위적으로 꾸며 해부학적으로 기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온갖 장식이 넘쳐나는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상징과 암시도 일부 전문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이 양식을 '매너리즘'이라 부른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마치 한 편의 연극 장면을 연상시키는 종교화를 그렸다. 인물들은 경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사실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거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인물 군상을 가득 채우는 그의 그림들은 훨씬 뒷세대의 예술가, 특히 피카소(<아비뇽의 처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바로크는 예술 개념으로는 '기형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며', '과장된' 양식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술가인 카라바조는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허구적인 냄새가 나는 대신 신빙성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보면 명암 대조가 뚜렷해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마치 번개가 옆에서 내리치는 것 같은 조명 효과가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기존의 성인들의 표현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장면이 대부분이었던 이전의 종교화를 카라바조가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카라바조(좌), 1598년과 젠틸레스키(우) 1612 혹은1613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a Gentileschi,1593~1653)는 카라바조 화풍을 이어받은 화가이다. 그러나 독자적인 화풍을 찾으려 고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죽은 후 곧바로 잊혔다가 300년이 지난 뒤에야 재발견되었다. 당시 여성 화가는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려도 서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누드화를 그리는 것이 금지된 탓에 여성의 그림은 남성의 그림보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금지 탓에 남성이 더 잘 그리게 되었고 여성은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편견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화가로 성공하는 여성이 나오면 '기적' 같은 일이라는 말을 들으며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08 강제와 자유 사이에서의 삶_바로크 시대의 예술가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예술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군주나 귀족, 그리고 교회 지도자 밑에서 일해야 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의 <시녀들, 1656년>에서 궁정화가로서 자신이 종속되어 있는 그 권력 위에 올라서 있다. 그림을 보는 우리는 신기하게도 원래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가 서 있었을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 화가가 이 그림에서 당당하게 함께 어울리고 있는 왕의 가족은 이제 어느 누구와도 대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술이고 예술가 자신이다.  이 그림에서야말로 예술의 위엄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선포되고 있기에 <시녀들>을 '회화의 신학'이라 부른다. 

 

 

09 예술 공장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부와 권력을 지닌 시민 계급이 있어서 작품을 주문하는 계층이 다양했고 또 수적으로도 월등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상업과 해운업을 통해 부유해졌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 시민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민을 상대로 하는 최초의 예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수많은 공방이 생겨나 경쟁적으로 그림을 제작했다. 빵집 주인보다 화가가 더 많은 지역이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의 회화는 번성했다.

갤러리스트라는 이름을 내건 예술 상인들이 등장해 전시회를 열고 대중의 기호를 선도했으며 결국 이들을 통해 가장 돈을 많이 번 예술가들이 유행을 이끌었다. 

유행이 바뀌듯 미적 감각도 상대적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in, 1606~1609)는 예술가가 시장에 종속된 새로운 현상의 대표적인 예다. 그의 장기는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기쁨과 불안, 사랑과 고통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삶의 말년에 이르러 대중의 기호와 멀어짐으로써 점점 곤란을 맞게 되었지만 대중의 변화된 욕구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주문자에게 종속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예술가의 좋은 본보기다. 주문제작보다는 독자적인 창작을 선호했고 예술 시장에서 자유를 추구했다. 이로써 궁정 예술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현대의 이른바 '전시 예술가'의 길을 선취했다. 익명의 대중, 바로 예술 시장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려 한 것이다.  

 

10 색채와 형식의 투쟁

오늘날까지도 회화는 개개의 분야나 '장에' 따라 나뉜다. 예술 아카데미에서 정물화, 장르화, 풍경화, 초상화, 역사화 등은 각기 다르게 평가되었다. 그중 풍경화가 가장 낮게 평가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화가도 성공을 거두어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1682)과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다. 터너는 회화를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화가는 이 과정에 언제든 자의적으로 종지부를 찍는 사람이라 파악했다. 터너에게 회화는 유희이자 실험이었고 이런 방법으로 터너는 20세기 추상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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