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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의 먼지/미술방

현대미술의 상실 / 톰 울프

by 책방의 먼지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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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페이지의 얇은 책이다. 가독성도 좋고 하지만 내용은 만만치 않다. 현대미술 전반을 다룬다기보다 추상미술 이후 그린버그 등의 이론가와 예술의 관계에 관한 톰 울프의 견해가 지배적인 책이다. 우선 주요 내용들을 정리해 보자면,

 


톰은 뉴욕 타임즈 1974년 4월 28일 일요판을 읽고 현대미술의 실체,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그림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깨달았다고 한다.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이 곧 보는 것Believing is Seeing, 왜냐하면 현대미술은 완전히 문예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림이나 다른 작품은 오직 문의를 예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프롤로그로 책의 문을 연다. 

 

아파치 댄스

1900년까지 화가들의 싸움터는 두 차례나 옮겨졌다.

17세기 유럽의 화가는 (네덜란드 제외) 현실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귀족 또는 왕실에 기생하여 사는 식객이었다. 일반 미술과 궁정 미술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18세기는 그 무대가 살롱으로 옮겨지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예술가들은 살롱을 떠나 세나클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세나클은 카페 같은 곳에 모여드는 동인 집단을 말한다. 그 세나클과 함께 근대적인 'the Artist'상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the Artist'는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삶, 평민이지만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상태만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된다는 것은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중산층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계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시민들이 볼 수 없는 차원의 세계를 보고, 정신은 고매해지고 생활은 낯설게 하며 영원히 젊음을 지키는 것, 한마디로 보헤미안이 되는 것.

하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의 살롱은 떠났으나 상류사회의 세계마저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명성을 원하며 그의 후원자들은 그들을 후원함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입체파의 말을 탄 뉴욕

1920년대에 유럽에서 현대미술은 사회적 붐을 일으켰다. 미국에선 록펠러나 굿이어 같은 부유한 뉴욕 상류 인사들에 의해 미국 땅에 도착해 1929년이 되자 가장 위압적인 방식으로-현대미술관이라는 형태로-확립되고 '제도화'되었다. 1930년대 중반이 되자 현대미술은 이미 세련된 멋의 대명사가 되었다. 기업체들마저 상업뿐 아니라 문화도 수호하는 힘을 보이기 위해 현대미술을 내걸었다. 

 

현대미술의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이론에 크게 의존했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운동, 새로운 주의는 모두 예술가가 다른 세상 사람들(즉 부르주아지)이 이해하지 못하는, 새롭게 세계를 보았다는 선언이었다. '우린 알아냈어!'라는 외침으로 어리석은 대중들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무엇을 알아냈단 말인가? 에서 이론이 등장할 필요가 있어졌다. 이제 이론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와 로젠버그 그리고 평면

그린버그와 로젠버그가 놀라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은 윗동네 비평가와 달리 보헤미아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르 몽드'가 자연히 귀를 기울였다.

그린버그의 이론은 입체파나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깨달았듯 그림은, 그것을 통해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유리창이 아니다. 회화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평면, 평면성을 목적지로 삼았다. 1950년에 이르는 대부분의 이론은 그린버그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여기에 로젠버그가 등장했다. 그는 모던 이전의 사실주의적 미술이 지녔던 정서적 충격을 결합하고 있다. "캔버스 위에서 진행되는 것은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라고 말하며 액션페인팅에 관심을 두었다.

 

이 장에서 톰 울프의 재미난 표현이 나오는데 "즉 이론들을 모른다는 것은 '말씀'을 모른다는 것"이란에서 사용된 이론을 '말씀'에 빗댄 표현이다. 초기 모더니즘은 19세기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그것의 추상이었다. 존 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청사진이 건축들의 도해인 것처럼 모더니즘은 사실주의의 도해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초기 모더니즘 그 자체, 특히 입체파에 대한 반발이었고 추상의 추상, 청사진의 청사진, 도해의 도해였다. 이 실체들은 '말씀'없이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미술계에 등장한 새로운 절차는 "우선 '말씀'을 배워라. 그러면 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스타인버그의 등장

팝아트의 시대는 보통 1958년 1월 20일부터 2월 8일까지 제스퍼 존스가 레온 카스텔리 화랑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가졌던 일을 기원으로 삼는다. 존스와 라우센버그는 엄숙함과 진지함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존스는 평면성의 법칙을 범하지 않고 '설화적'인 내용을 끌어들이지도 않으면서 현대미술 속에 사실적인 주제들을 도입한 것이다. 즉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들-깃발과 숫자-을 미술의 대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이 도구들의 '설화적' 성격을 표백한 것이다. 내용도 형식도 아닌 더 높은 종합인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예술에 관한 것이다."이란 말을 했다고 하고 그는 존스의 평면성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정체를 드러냈다고 하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현대미술의 종착지

이제는 더 이상 사실주의도, 사실적 대상도, 선도, 형태도, 윤곽도, 붓질도, 감정적 환기도, 그림 틀도, 벽도, 화랑도, 미술관도, '평면성'이라는 신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대하는 끊임없는 고뇌도, 관람객의 필요도, 투영된 아집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인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수신자'와 누구도 해당될 수 있지만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3인칭의 '화가 the Artist'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화가'에 대해서는 존재마저도 요구되지 않고 있다. 현대미술은 점점 좁아지고 죄어오는 나선형의 계단을 끝없이 기어오르다가 수지상 돌기 시냅스의 마지막 접합부에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자유의 1 에르그로 미술 자체의 궁극적 구멍을 통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 출구에서 '미술이론'으로 변신해서 나타난 것이다! 순수하고도 순수한 '미술이론', 종이 위에 적힌 문자, 시각적 환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문학 - 평면으로, 보다 평면으로, 가장 완전한 평면으로- 그리고 천사와 정령처럼 신성하고 비가시적인 비전으로······.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주 작아진 예술가와 대조적으로 주도적인 이론가들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조금은 극단적인 부분(2000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현대미술관이 1945년부터 75년 사이의 위대한 미국미술 회고전을 열게 되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3명의 주요 인물로 부각될 화가는 폴록, 드 쿠닝, 존스가 아니라 그린버그, 로젠버그, 스타인버그가 될 것이라고 거대한 이론의 설명서들이 걸려 있을 거라는- 이론을 신성시한)이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이론에 지배된 예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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