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은 지난 세미나가 간극의 구조를 통한 무의식의 소개라고 논점을 명확히 밝히며 수강자 중 한 사림인 자크-알랭 밀레의 발제문(자신이 욕망의 기능에 관해 말하면서 존재(에의)-결여라 지칭했던 것을 결여의 구조화 기능에 결부시킨)에 관해 언급하며 밀레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강의를 이어나간다.
"무의식 기능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간극이기 때문에, 저는 그 간극을 통해 무의식 기능을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간극의 핵심이란 바로 어떤 존재론적인 기능이라는 점에서, 그의 질문은 특히나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키워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 욕망의 유한성 / 달아나는 것 / 무의식의 위상은 윤리적인 것이다 / 이론 속의 모든 것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 데카르트주의자로서의 프로이트 / 히스테리증자의 욕망
무의식은 존재론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무의식을 잠시라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실현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 (52)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인간 욕망은 통제 불가능하며 무한한 것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신분석 경험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욕망의 유한한 기능이다.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보다도 더 어딘가에서 한계지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욕망. 하지만 라캉은 '욕망'이라고 했지만 '쾌락'이라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쾌락은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했다. 쾌락원칙은 항상성의 원리인 반면 욕망은 자신의 경계선, 자신의 고정된 관계,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리게 된다. (54)
"무의식의 기능에서 존재적인 것은 틈새fente입니다. 이 틈새 사이로 무엇인가가 순간적으로 환하게 드러나지요. 우리의 장 속에서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틈새가 금새 닫히면서 그것이 사라지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54)
라며 이것에 대해 살펴본다.
ㅣ "무의식을 정의하는 수준 자체에서 우리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순이나 시공간적 배치뿐 아니라 시간의 작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틈새가 일으키는 맥동운동의 절분된 구조를 여기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사라지면서 출현하는 것apparition évanouissante은 논리적 시간의 시작과 끝이라는 두 지점 사이에서, 즉 직관 자체로부터 무언가가 항상 생략되고 상실되기까지 하는 순간인 보는 순간과, 무의식이 완전히 손에 붙잡히지 않고 항상 미끼에 속았다는 듯이 되돌아서 빠져나가 버리는 순간 사이에서 이뤄지지요.
따라서 존재의 수준에서 볼 때 무의식은 달아나는 것입니다."(55~56)
"제가 존재의 수준에서 매우 취약하다고 지적한 무의식의 위상, 그것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제가 프로이트의 행보가 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에게서 그와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닥쳐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흔히 말하는 학자의 용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무의식의 위상을 두고 존재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거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프로이트 자신이 무의식에 제 위상을 부여하면서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7~58)
그 후 「꿈의 해석」 마지막 장 잠든 아버지가 꿈속에서 "아버지, 제가 불타고 있는 게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실제로 아들의 시신이 옆방에서 불타고 있었던 예를 들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결부시킨 햄릿 신화 속 망령이 짊어진 아버지의 죄악의 무게 등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이런 꿈의 망각에 관한 논의와 주체가 하는 꿈 이야기의 논의에서 중심 용어는 진리가 아닌 확실성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행보는 확실성의 주체를 토대로 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관해 확신할 수 있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지요...... 의심은 바로 프로이트에게 확실성의 근거입니다...... 즉 의심 자체는 무언가 지켜야[숨겨야] 할 것이 있음을 뜻하는 기호라는 것입니다. 의심은 저항의 기호인 셈이지요."(60~61)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한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정확히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프로이트는 자신이 의심하는 바로 그곳에 무의식이라 할 어떤 생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심했지요. 무의식적이라 함은 그 생각이 부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타자들[다른 것들]에 관여하는 순간부터 그는 바로 그가 의심하는 자리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불러들이는데, 바로 이 '나는 생각한다'를 통해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게 될 겁니다. 요컨대 프로이트는 조금이라도 누군가가 자기 대신[자기 자리에서] 사유를 하고 있다면 ㅡ 바로 여기에 도약이 있는 것이지요 ㅡ 그러한 사유가 이를테면 그것 자체만의 '나는 존재한다'와 함께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프로이트와 데카르트 사이의 비대칭성이 드러납니다. 둘 사이의 비대칭은 주체의 확실성을 정립하는 최초의 행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은 프로이트에게선 주체가 거처하는 곳이 바로 그 무의식의 장이라는 데 있지요...... 프로이트 덕분에 우리는 무의식의 주체가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그가 확실성을 얻기 이전부터 사유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61~63)
"제가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 주체의 상관항은 더이상 속이는 타작 아니라 속는 타자라는 사실입니다."라고 말하며 분석 경험 속 프로이트의 여성 동성애자 사례 보고서를 언급한다.
도라의 예를 들며 히스테리증자의 욕망이 아버지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프로이트는 이를 올바로 공식화내지 못해 치료를 중단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자신의 공식의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고 설명한다.
즉 무의식의 주체는 타자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이 '타자'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예를 들어준 것 같은데.... 정확히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앞으로 계속 읽어나가면 알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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