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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2000년대 노트

2001년 디지털 회화적 사진,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제프 월

by 책방의 먼지 201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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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중견 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전시가 열린다. 디지털 기법을 이용하곤 하는 회화적 사진이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다.

 

사진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직접 남긴 흔적이며, 이에 반해 디지털 이미지는 컴퓨터로 스캔한 정보를 조작해 만든 하나의 스크린이다.

사진과 디지털 사이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을 탐구해 온 작가 중 제프 월(Jeff Wall, 1946~)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1955~). 이들의 탐구는 때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물리적 위상 및 존재론적 본성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의구심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방편적 통일성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메시지」(1961)에서 정의한 사진은 "코드 없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복합적인 코드들(컴퓨터에서 쓰이는 '코드'의 의미까지 포함해서)에 의해 촬영된다. 이런 새로운 지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지시성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미술 내에서 사진이 응용되는 범위도 변경시켰다. 포토 콜라주나 포토 몽타주는 모두 지시적인 사진을 명시적으로 병치하는 방식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을 이용한 조작 방식은 거의 그 이미지 자체가 몽타주다. 물리적으로 오려낸 몽타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음매 없는 결합과 몰핑을 통해 만들어진 디지털 복합물은 사진 다큐먼트와 전자 퍼즐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월과 구르스키 같은 미술가의 작업에서는 이런 진보된 테크놀로지의 결과물인 디지털 사진이 종종 역사 속의 미술을 환기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명시적인 지시 관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회화적 구성이나 서사적 테마를 취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구상회화나 고전 영화에 가까워진다. 미니멀리즘 이후 프로세스 아트, 신체미술, 설치미술 같은 진보적인 미술에 의해 공격받던 회화 이미지가 다시 디지털 사진이나 다른 장르의 미술을 통해 돌아온다.

Jeff wall 「Diatribe」(1985)
 니콜라 푸생 「디오게네스가 있는 풍경」(1648)

 

월은 자신의 미술사적 시선의 초점을 전통 회화뿐 아니라 초창기 모더니즘 회화에 맞추고 있다. 비평가 티에리 드 뒤브가 썼듯이 “월은 마치 역사의 갈림길, 즉 마네의 출현과 함께 회화가 사진의 충격을 받아들이던 바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거기서 월은 근대 회화가 택하지 않은 길을 따르며, 한 명의 사진가로서 근대적 삶을 그리는 화가로 현신한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월은 현대 사진 안에 ‘근대적 삶의 회화’를 도입하면서 그것의 사회적 비판도 함께 옮겨 놓고자 한다. 즉 마네가 종종 자본주의 사회의 지나간 신화에 대해 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신화를 드러내고 동시에 극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월은 수차레 마네를 인용한다. 「이야기꾼은 마네의 유명한 「풀밭 위의 점심」을 고속도로 교각 아래 황무지로 옮겨 놓은 작품이다. 여가를 즐기는 파리의 보헤미안들을 자신이 태어난 밴쿠버의 캐나다인 노숙자로 대체했다.

일부 비평가는 이런 미술의 통일성이 억지라고 여긴다. 또 다른 비평가는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과 여러 작품들을 짜깁기 한 문제 등을 지적한다. 월은 다음의 두 가지를 모두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사회적 질서를 반영하는 회화적 질서를 생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두 가지 질서가 모두 부패해 있으며 후자가 전자의 징후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월이 마네에게서 얻은 주된 교훈이다. 월에 다르면 마네는 위기에 처한 전통회화(즉 따블로)를 물려받았는데 사진의 확산은 단지 그 위기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이전의 전통 회화에서는 유기적이며 구성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마네에게는 기계적이며 파편적인 것이 돼 버렸다. 마네는 당대 살롱 회화의 ‘방편적 통일성’에 반대했다. 월은 그런 통일성을 “황폐하고 죽어버린 회화 개념을 기념비로 만드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통합된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통합과 파편화’의 변증법을 회복해 진행시키려고 하며 그것을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세속적 계몽’의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Jeff Wall 「이야기꾼 The Storyteller」 1986

 

정신착란의 공간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는 훨씬 더 사진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일종의 회화적 긴장을 생산해 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 긴장의 일부는 디지털 몽타주를 통해 생산된다. 90년대에 이르면 그의 사진은 대형화되고 회화화됐지만, 그는 결코 월만큼 미술사적 수사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기에 월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그의 주된 관심은 현대적 ‘숭고’에 있었다. 노동과 유희를 불문하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특색을 지닌 ‘하이퍼스페이스’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많은 공간들은 이미 스펙터클 하며, 인간과 상품은 한꺼번에 총체적인 디자인 속에 배치되거나 “대중 장식”으로서 배치된다. 패턴의 반복적 형태와 색채를 한층 강조하며 두어 개 이상의 시점을 사용해 접합시킨 이미지처럼, 다른 방식으로는 시야에 들어오거나 재현되지 못할 법한 공간을 이미지로 만들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공간들은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지 지도”를 시험한다. 그의 사진에 나오는 공간들은 거의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 공간들은 선진 자본주의의 특징인 공간의 탈영토화를 입증하며, 구르스키는 진일보된 디지털 편집을 사용해 이런 탈영토화를 부각시킨다. 

관람자를 한 장소에 구별해 놓으려는 회화와 사진의 과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이미지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는 오로지 구르스키와 다른 작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컴퓨터적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시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시점과 물리적 장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시각은 완전히 물신숭배적인 방식을 통해 이 세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심지어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미지의 겉모습은 완전히 담아내는 반면 노동의 현실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인간 주체가 차지할 자리가 좀처럼 없는 품위 없는 세계를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구르스키는 월이 너무나 재빨리 복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 즉 통일된 주체의 권위를 너무나 철저하게 제거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Andreas Gursky 「Times Square」,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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