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미언 허스트가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작품을 전시한다. 실제 사람의 두개골을 백금으로 주조해 1400만 파운드 어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이 작품이 5000만 파운드에 팔리면서, 미디어의 주목과 시장의 투자 가치를 노골적으로 내세운 미술이 등장한다.
신자유주의 진영의 후원자들
회화와 조각이 운반 가능한 형태로 제작됐던 르네상스 이래 미술 생산은 근본적으로 시장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미술시장이 탄생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60년대 경제 호황기에 부상한 부르주아들은 미술, 특히 미국 팝아트에 대규모로 투자할 만한 자본을 보유했다. 그와 동시에 딜러나 켈렉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업 갤러리가 급속히 팽창하던 중이었다.
70년대의 경기 침체 이후 등장한 레이건과 대처의 규제 완화 정책은 ‘슈퍼리치’라는 신흥계층을 양산했다. 그중 일부는 거물 컬렉터가 됐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은 비판 형식의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 장소 특정적 미술보다는 시장성이 입증된 회화와 조각을 선호했다. 찰스 사치는 이런 호황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90년 미술시장은 극적으로 침체됐는데 1987년 주가 대폭락 이후 3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10년 뒤 신자유주의 경제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80년대를 상회하는 개인 자신의 축적이 이루어지면서 미술 시장은 극단적으로 과열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크리스티 경매의 회장 대리 에이미 카펠라초에 따르면, 새로운 유형의 컬렉터들은 동시대미술을 “담보화, 거래, 양도소득세의 부과 연기가 가능한 자산”으로 간주하며, 미술시장도 증권시장의 하나라고 본다. 한편 다른 투자 영역에서는 불법인 내부자 거래와 가격 담합이 미술시장에서는 일반적 관행이라는 점 또한 커다란 매력 중 하나다.
전시에 대한 욕망은 규모와 스펙터클에 대한 수요를 낳아 결국 작품 제작과 전시 비용이 증대된다. 문제가 되는 작품이 라처드 세라의 육중한 조각이든, 매튜 바니의 호화 퍼포먼스나 영화, 또는 설치 작업이든, 아니면 올라퍼 엘리아슨의 대형 환경 작업이든 상관없다. 그런 프로젝트의 비용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동시대 미술의 고객층이 국제적으로 확대된다한들 극소수의 사람만 접근 가능하다. 이로써 사실상 미술 생산에서 대부호의 후원이라는 경직된 체제가 부활했다.
개인 컬렉션이 미술관이 된 역사는 매우 길다. 그러나 근래에는 공공문화를 부분적으로 사유화하는 일이 그 반대만큼이나 빈번해졌다.
동시대 미술이 점점 더 미디어와 시장과 밀접해지는 현상은 또 다른 방식으로 미술에 영향을 준다. 비평가 줄리언 스탈라브라스는 이런 상황이 기업 대중문화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젊음의 이미지 강조, 잡지 화보로 실릴 법한 작품의 범람, 스타 미술가의 바상, 즉 상업문화와 패션 산업에 아첨하거나 후원자를 꼬드기는 작품, 그리고 제한적이고 세심하게 제어된 경우를 제외한 비평의 부재”라고 지적한다. 이런 연관들도 의미심장하지만 훨씬 더 구조적인 문제들이 있다. 가령 한때 보헤미안 아웃사이더로 간주되던 미술가들이 이제는 후기 포드주의 경제에서 혁신적인 노동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회학자 뤽 볼탕스키와 이브 치아펠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이루어진 경경 관련 담론들은 한때 예술가적 자질로 여겨지던 태도와 속성들을 장려해 왔다. 이를테면 “자율성, 즉흥성, 리좀형 역량 발휘, 멀티태스킹, 쾌활함, 타인과 새로움에 대한 열린 자세, 유용성, 창조성, 앞을 내다보는 직관, 차이에 대한 감수성, 경험에 대한 경청과 다양한 경험의 포용, 비격식을 선호하고 개인 간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들이다.
경영 관련 담론이 이런 식으로 예술가적 자질을 흡수하던 바로 그때, 워홀을 무색하게 할 만큼 철저하게 비지니스 모델을 수용한 미술가들도 있다. 데미언 허스트는 광적으로 여러 일을 멀티태스킹 했고 또한 제프 쿤스와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대규모로 조수를 고용했다. 미술관 미술과 대중문화 간의 경계를 허물었다가 다시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경계를 세우곤 하는 이 두 작가는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변화를 몸소 봉 주고 있다. 누구의 경우든 시장은 실천을 구조화한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은 미술의 매체 그 자체이다.
시장은 매체다
지위와 가치의 혼란, 즉 예술/상업, 고급/저급, 희소/대량, 고가/저렴함을 뒤섞는 혼란에서 오는 불편함은 분명 워홀의 작품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대립들은 경박스러운 기뿜, 체념 어린 절망, 혹은 이 둘의 조울증적인 결합 따위로 파열됐으며, 그 바람에 긴장감은 거의 없고 통찰도 별로 없다.
미디어의 주목을 경제적 이득으로 전환시키면서 논란을 자초했던 허스트의 작품에도 이와 같은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포픔알데히드가 채워진 탱크에 그 유명한 상어를 띄우기 전부터, 그는 이미 “센세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이 더 이상 센세이션 하지 않으며” 무감각은 충격의 이면이고, 죽음이 자신의 진정한 테마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업은 2007년에 사람 두개골을 백금으로 본떠 1400만 파운드 어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작품이다.
벤야민은 30년대 대공황기를 고찰하며 보헤미안 미술가의 반사회적 행위가 생각만큼 전복적인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당대 리얼리즘의 좌절과 초현실주의의 파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따. “20세기 부르주아에게 남겨진 과제는 니힐리즘을 그들의 지배 기제로 포섭하는 일이었다.” 이 니힐리즘을 시대에 맞게 갱신하고 심화시켜 반영한 것이 워홀의 계보를 잇는 쿤스, 무라카미, 허스트가 이룬 모호한 성과이다.
불경기 미학?
2008년 금융위기로 이런 전개의 향방은 묘연해졌다. 최근의 불경기가 예쑬가의 역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락 또는 스펙터클로서의 예술과 관련된 기대감을 일부 덜어 주었는가? 동시대 미술은 공론장으로서의 차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술관은 지속 가능한가, 아니면 일부 기관들의 실패가 다른 양태의 조직체로 귀결될 것인가? 위기는 투자받지 못한 영역들에 새로운 기회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후원자들이 권력을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는가? 동시대 미술이 금융계의 가상의 부를 창출하는 파생 상품 보급 전략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품 제작을 하는 등, 헤지펀드나 초대형 은행과 함께 번성한 거라면 이런 체제와 동시대 미술의 공모에는 어떤 함의가 있는가? 각종 미술 비엔날레의 존재 이유를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지역 개발과 국제 경제 논리인가? 세계화의 다른 측면들에 주목할 것인가, 아니면 지역으로 다시 철수할 것인가, 철수한다면 이는 미술계의 보호주의에 해당되는가? 마지막으로 유력 딜러와 컬렉터들이 좌지우지하는 미술시장과 계속 무관할 수 있다면, 미술 비평은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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