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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2000년대 노트

2007년b 조각의 변화와 전략, Tom Burr

by 책방의 먼지 2019.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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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비적이지 않은:21세기의 오브제> 전이 뉴욕 뉴 뮤지엄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젊은 세대 조각가들이 아상블라주와 집적에 새롭게 주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80년대 말 ~ 90년대 초 이후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조각가들은 이전 세대 유산들에 대립각을 세우며 자신의 작업을 정의했다. 그 유산은 미니멀리즘(도날드 저드와 칼 안드레)과 포스트 미니멀리즘, 에바 헤세, 브루스 나우먼, 리차드 세라), 그리고 빚고 자르고 깎고 구축하는 물질적 행위들을 대체했다고 주장한 개념주의(한스 하케, 더글러스 휴블러, 로렌스 와이너)의 반 조각적 전제들이다. 

 

새로운 동기,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전략

이 급진적인 세대교체와 패러다임 전환에는 수많은 이질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첫 번째 요인은 값싼 소비품에 대한 거의 마조히즘적인 수용을 들 수 있다. 모더니즘의 전 역사를 통틀어 상품은 늘 조각(레디메이드 제외)이 대립해 온 오브제 유형이었다. 진부한 것일 수밖에 없는 상품의 운명과 반대로 조각은 언제나 기념비적 영구성이나 유토피아적 구축을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의 작업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량생산된 소비 물품들을 조합한다. 

조각의 담론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과 그러한 조각의 구축주의적, 미니멀리즘적, 현상학적 기획을 계획적으로 무산시키는 것, 이 두 입장 간의 갈등은 20세기 조각을 이끈 근본적인 변증법의 하나다. 새로운 세대의 조각가들은 대중문화 오브제에 대한 집착을 넘어, 두 번째 새로운 역사적 결정을 공유했다. 그것은 조각적 조형성에 대한 규약을 다양한 텍스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제 조각에 대한 지각이 공적 사적 공간을 실제로 통제하는 힘인 광고나 상품 생산, 미디어 디자인, 전시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 번째 동기는 공적 공간의 경험을 정의하는 데 있어 조각의 역할에 관한 전통적 가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20세기 조각 오브제들은 여전히 공공영역에 위치한 것으로 지각되길, 더 나아가 공공영역 구성에 기여하길 열망했다. 그러나 공공성 지각에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오래전부터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상품 생산 체제였다. 따라서 사진을 통한 매개가 이 시대 조각의 임무가 됐다.  

 

이자 겐즈켄 「슬롯머신 Spielautomat」, 1999~2000년

조형물과 사진 이미지의 복합체는 서로 다른 재현 형식이 공공영역에서 주체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사실만 단순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통적으로 조형성의 기본 열망이자 조각적 경험의 바람이었던 동시적인 공적 지각을 위한 믿음직한 조건들을 물질적 구축물만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말해준다. 

후기 초현실주의적 아상블라주, 특히 조지프 코넬의 상자들, 그리고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브루스 코너의 아상블라주는 전통적 조형성에 대항하기 위해 사진을 조각적으로 배열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미술가들은 주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로서 사진을 조각에 포함시켰을 뿐, 그것을 매체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공간적이고 담론적인 틀, 발견된 오브제, 그리고 무작위로 뽑은 수많은 사진 이미지들의 조합이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정체성과 자기구성의 공간 형성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이 모두 동일한 정도로 디자인과 미디어의 결과인 것이지, 전통적으로 정의된 조각의 공간성과 조형성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디자인, 전시, 그리고 장식

새로운 세대 조각가들의 작품이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한 세기에 걸친 레디메이드와 아상블라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아직 충분히 바뀌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0세기 후반까지 산업 생산과 유토피아적 건설의 지평이 조각을 정의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조각 경험은 근본적으로 소비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조각을 생산한다고 말하는 것, 전통적 정의에 기댄 이 관념은 미니멀리즘, 나아가 리처드 세라까지는 적용 가능할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새로운 세대의 조각가들은 사물을 단순히 배열해 놓고 일상 속에 감춰진 다양한 촉감들을 펼쳐 보이고 재료와 사물의 세계와 새로운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하여 조형성의 기준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거나 바람직하지 않았던 패션, 디자인, 가정의 삶, 버내큘러 건축에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예를 들어 톰 버(Tom Burr, 1963~)의 공적 공간 개념은 초역사적 현상학적 공간성을 명백히 거부한다. 그의 구조물은 공간 경험 자체가 언제나 사회적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통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작품의 알레고리적 차원들은 공간 경험에 내재돼 있는 조절과 통제라는 조건들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전용, 즉 방향 전환한다. 그리고 전복적인 반항과 욕망의 새로운 사회적 공간적 배치를 제시한다. 그의 1997년작 「상자 속 영화관 좌석」은 칸막이가 되어 있는 좁은 공간의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오래된 영화관에서 가져온 실제 좌석이 놓여 있다. 폐허가 된 대중문화의 제의적 공간에서 뜯어 온 이 유물의 앞면에는 전형적인 붉은색 벨벳이 씌워 있고 밑에는 관객이 씹다 버린 껌들이 붙어 있다. 이렇게 조각적으로 중립적인 고전적 입방체 속으로 신체의 에로틱한 감촉 표면 재료라는 저속한 일상성이 침투한 것이다. 즉각적으로 거의 누구나 대중문화의 경험에 대한 회상에 빠지면서, 의자는 두렵고도 낯선 친밀감과 값싼 매혹의 기억들을 제공하고, 신체도 과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던 대중문화 공간에 의해 통제되고 역사적으로 매개된 하나의 파편임이 드러난다. 이 노스탤지어의 차원은 이내 비판적 계시로 바뀐다. 즉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자와 좌석은 조형성과 조각적 유토피아주의 사이의 풀리지 않는 역사적 갈등을 보여주는 한편, 대중매체의 실상, 즉 동시적이고 집합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모든 열망이 시작부터 이미 좌절됐음을 드러낸다.  

톰 버, 「상자 속 영화관 좌선 Movie Theater Seat in a Box」, 1997년

 

인물상과 인체모형

지표성과 도상성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인물상은 이젠 하나의 사물로서 사진 이미지와 비슷한 것이 되고,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더 강렬하고 불쾌한 존재감을 갖게 된다. 더욱이 산업적 인물상들의 언캐니한 현존은 일상적인 상품 진열과 전시 관례의 경계를 흔들어 놓는다. 그 인물상이 있을 곳이 전시장이 아니라 상품 진열대라는 생각이 들면서, 쇼윈도와 미술관, 패션 디스플레이와 조각 생산 사이에 드리워졌던 학제적 구분은 해체된다. 

사적인 삶과 공적인 것을 전통적으로 분리해 온 경계의 붕괴가 그들 작업의 무질서함으로 표현되고 그 무질서함은 스펙터클화의 압력으로 인해 경험의 모든 영역이 전반적으로 뒤썩이게 되는 상황을 드러낸다. 뒤샹의 전시 디자인에서 이미 나타났듯이, 겐즈켄과 히르슈호른의 작품에서 하나의 단일체로 보이는 인물상들은 패션과 계속해서 심화되는 소비 조건의 교차점에 그럴듯하게 위치해 있다. 소비 영역과 그 반대편에 있는 일상의 생태학적 파괴와 영구적인 전쟁의 실천, 이 둘 사이의 구분이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깨버리는 것, 그리고 이 두 차원 모두를 우리 시대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로 제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 작품들이 전하는 위대한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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