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견 작가 마이크 켈리의 전시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퇴행과 애브젝션에 대한 관심을 집중 조명하고 로버트 고버와 키키 스미스를 비롯한 다른 미술가들이 조각난 신체의 형상들을 이용해 섹슈얼리티와 필멸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루이즈 부르주아와 에바 헤세는 60~70년대도 잘 알려져 있었지만, 80~90년대 들어 충동과 환상에 의해 심리학적 양상을 띠기 시작한 신체와 공간에 대한 탐구가 다시 공감을 얻게 되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페미니스트 미술가들과 로버트 고버 같은 게이 미술가들은 AIDS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이성애적 욕망의 대상인 초현실주의적 물신들을 동성애적인 애도와 멜랑콜리를 암시하는 수수께끼 같은 대상으로 변형시켰다. 또한 이들 미술가들은 루이즈 부르주아처럼 "회상을 재경험하는" 미술 모델을 발전시켰다. 이 모델을 외상적 사건을 징후적으로 행동화(acting-out)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작품은 기억이나 환상이 그대로 시도되는 장소가 된다. 반면 이 모델을 외상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적용 훈습(working-out)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작품은 치료나 '엑소시즘'이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부르주아)
가시화된 환상들
키키 스미스는 부르주아처럼 어머니와 아이 두 주체를 연상시키지만 방식은 더욱 즉물적이다. 스미스는 밀납, 석고, 도자기, 청동 같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서 심장, 자궁, 골반, 갈비뼈 같은 신체의 기관이나 뼈의 주물을 떴다. 스미스의 작업에서 환기되는 원초적 충동이 있다면 죽음에 대한 충동일 것이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신체의 내부는 부르주아처럼 공격성을 통해 활력을 얻기보다는 배출돼 버린다. 즉 남겨진 것들은 내장, 앙상한 뼈, 벗겨진 가죽들이 딱딱하게 굳은 찌꺼기뿐이다. 「장」(1992)(실제 장과 같은 길이의 청동 줄을 바닥에 생기 없이 길게 늘어 놓았다)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그녀는 이 '신체 내부에 있는 것들'의 상실을 통해 자아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 상실에 대한 불안은 어머니의 신체에 집중되는 듯 보인다. 어머니에 대한 이런 상상은 아이의 재현에서도 나타난다. 아이 역시 어머니만큼이나 학대받는 대상으로 제시한다. 대부분의 부르주아 작품이 그렇듯 스미스의 작품도 가부장제를 공격한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남성의 파멸을 암시한다면 스미스는 주로 폭행당하거나 애도의 대상이 된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다.
로버트 고버의 작품에서는 애도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도 부르주아와 스미스처럼 신체의 일부를 제시하여 미학적 경험, 성적 욕망, 죽음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묻는다. 그가 제시한 장면들은 실제 사건보다 수수께끼 같은 환상들을 연상시키고, 이런 점에서 고버는 스미스보다는 더 현실적이며 덜 즉물적이다. 실제로 그는 "현대인에 대한 자연사 디오라마"라고 부르는 설치물들을 통해 그런 전시 방식이 지닌 하이퍼리얼하고 거의 환각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이들은 우리를 이중의 시공간, 즉 꿈속에서처럼 내부와 외부가 모호한 공간과 현재의 경험을 통해 걸러진 과거의 기억이란 시간 속에 위치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마치 삶 속에서 잊힌 사건들을 갑작스럽게 엿보는 관음증자가 되며 그 결과 과거이기도 하면서 현재이고, 상상된 것이면서도 실재인 두려운 낯설음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 스미스와 달리 고버가 연출한 것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의 욕망이다.
애브젝트의 상태들
90년대 초반은 계속되는 AIDS위기와 복지국가로의 진로, 그리고 만연한 질병과 가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 냉혹한 기간 동안 많은 미술가들은 일종의 항의와 저항의 표시로 퇴행을 연출했다. 이것은 주로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작업을 통해서 진행됐다. 폴 매카시(Paul McCarthy, 1945~)와 마이크 켈리(Mike Kelley, 1954~)의 작업은 특히 공격적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매카시는 거리나 고물상에서 동물 모양의 봉제 인형, 가짜 인체의 일부 등, 퍼포먼스를 위한 소품들을 구해 설치 작업을 했다. 또한 젊은이와 노인, 인간과 동물, 사람과 사물같이 서로 다른 형상을 이어 붙인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모든 차이의 구분에 도전하는 기괴한 행동을 연출했다. 이런 광경이 연출될 때조차 이 환상들은 대개 외설적이며, 어떤 미국 고딕 미술이나 고딕 소설보다도 음울하다. 왜냐하면 매카시는 자연과 문화라는 두 세계의 질서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모든 정체성의 구조(특히 가족)를 해체시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애브젝트는 90년대 초반 미술과 비평에서 상당히 유행하던 관념이었다. 정신분석학 이론가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정의에 따르면 애브젝트는 심리학적인 의미로 충만한 물체로 대개는 상상된 것이다. 이것은 주체(혹은 사람)와 대상(혹은 사물)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또한 이것은 낯선 동시에 친숙하며 내부와 외부라는 경계와 구분법이 얼마나 취약한지 폭로한다. 따라서 애브젝션은 주체성이 교란되는 상황, 즉 "의미가 무너지는"(크리스테바) 상황이다. 여기에 매혹됐던 켈리, 매카시, 밀러 같은 미술가들은 사회의 잔해물과 신체의 파편들을 통해 이를 형상화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 대부분의 미술에는 풀 죽은 것과 거부된 것, 혼란과 산란, 오물과 똥이 편재해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것들은 사회 체제에 저항하는 상태이자 물체들이다. 「문명과 그 불만」(1930)에서 프로이트는 문명화는 엎드린 신체, 항문, 후각 등을 억압하는 대신 직립한 신체, 성기, 시각 등에 특권을 주는 데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애브젝트 미술은 특히 항문과 배설물을 과시함으로써 문명으로 가는 이 첫걸음을 전도시키고 억압과 숭고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반항은 20세기 미술 저변에 잠재해 있는 강한 흐름이었으며, 뒤샹의 커피 분쇄기부터 피에로 만초니의 대변 깡통, 뒤이어 켈리, 매카시, 밀러의 지저분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들에게서 반항은 대부분 자기의식적이고 심지어 자기 풍자적이다.
이런 반항은 애처롭지만 한편으로는 뒤트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성적 차이의 법칙을 비틀어 버리고 그와 같은 차이가 모호해지믄 항문 세계로의 퇴행을 연출한다.
켈리도 주로 항문의 세계에 속한 작업을 했다. 「이론, 쓰레기 동물 봉제인형, 예수 그리스도」에서 토끼는 곰 인형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연결해서 하나로 만들 거야. 그러면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되지."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항문기에 대해 쓴 것처럼 "배설물(돈, 선물)과 아기와 페니스가 서로 구분되지 않는" 상징들이 뒤섞인 공간을 탐구한다. 다른 이들처럼 물질적인 무차별성을 찬양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차이들을 교란시키기 위해서이다. '넝마(rag)"를 뜻하는 독일어 룸펜은 룸펜프롤레타리아를 생각나게 하는데, 이 단어는 켈리의 어휘 사전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용어이며 애브젝트와 성질이 같은 것이다. 즉 문화적 숭고화나 사회적 구제는 물론, 형식적인 형태화마저 거부하는 타락한 것들의 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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