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명 중인 펠릭스」를 완성한 윌리엄 켄트리지는 레이몬드 페티본 등의 미술가들과 함께 드로잉의 새로운 중요성을 입증한다.
르네상스의 예술적 자의식은 회화 예술을 두 개로 양분했고, 그 두 경향은 로마의 드로잉과 베네치아의 색이었다. 드로잉은 윤곽선과 구성의 힘을, 색은 실내 공간을 빛나는 색으로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색채와 드로잉의 분리는 계속돼 입체주의가 명암법으로 아방가르드를 지배하기 시작한 20세기까지 이어진 듯하며, 오직 마티스만이 색채에 대한 진지한 도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이브-알랭 부아가 지적했듯이 마티스 자신은 "드로잉에 의한 색"이라고 말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회화 예술의 논리를 형성했던 구분을 무너뜨렸다. 몬드리안도 후기 작품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색선으로 사용하면서 마티스처럼 선과 색의 차이를 없애 버렸다. 그는 현실의 시각 경험에서 발생하는 대립들, 말하자면 색과 윤곽선, 형상과 배경, 빛과 그림자 등의 대립을 종합하는 추상 형식을 발견했다.
이 중 가장 스펙터클한 종합은 잭슨 폴록이 1950년과 51년에 만들어 낸 '드립 페인팅'일 것이다. 이 그림은 화려한 색의 선들이 서로 얽혀 있어 어떤 개별적 형태의 경계도 없으며, 어떤 윤곽선도 형성될 수 없었다.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의 말처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한정하거나 결정짓지 않았다. 선이 그 자체의 추상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빛과 색의 경험을 발생시키는 회화의 주된 원천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재현의 궁극적 원천인 선이 추상에 봉사하는 이런 역설적인 흐름은 20세기에 전개된 드로잉에 나타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을 반영한다. 벤자민 부클로가 주장한 것처럼 드로잉의 본질은 모체 형식(form of matrix)이거나 자소 형식(form of grapheme)이었다. 모체 형식은 공간적 환경을 평면적이고 추상적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입체주의자의 그리드가 르네상스 원근법의 기하학적 그리드를 단순화해, 직조된 캔버스라는 하부구조에 대한 묘사로 일반화시킨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자소 형식은 표현적인 흔적이었다. 몇몇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이 신체의 흔적을 활용하거나 사이 톰블리가 낙서처럼 갈겨쓴 글씨를 이용해 신경 운동이나 성심리적 충동의 지표를 기록한 것이 그런 경우이다.
폴록과 유사하게 솔 르윗의 드로잉에서는 빛나는 선의 모체 안으로 식별 가능한 형태가 녹아들었고 거기에서 색과 빛에 대한 경험도 함께 발생했다. 그러나 「여섯 개의 벽 각각에 고르게 분포된 1만 개의 1인치의 선」에서 볼 수 있듯이 상업적 렌더링과 컴퓨터 그래픽처럼 산업적이고 테크놀로지적인 형식의 드로잉이 손으로 하는 드로잉을 대체하고 있다. 드로잉의 쇠퇴는 드로잉을 추상이 아니라 재현에 다시 사용하는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에서도 입증된다. 실제로 잡지 광고나 만화책에 드로잉을 사용하는 대중문화의 권력이 재현을 산업화함에 따라 그래픽 표현은 개인적이고 표현적인 영역에서 상업적이고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캘리포니아 미술가 레이먼드 페티본(Raymond Pettibon, 1957~)의 드로잉은 대중과 개인이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위치한다. 그는 60년대 말 서부 해안에 존재했던 대항문화의 폐허 위에서 전개된 만화책과 '팬진' 문화에 드로잉을 위치시킨다. 그의 미술은 고야와 오노레 도미에가 석판화 같은 복제 기술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곤 했던 단순화된 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의 주체적 삶이 가장 비인간적이고 정형화된 캐리커처로 대체된 영역에 존재한다. 페티본의 그래픽 표현에서 보이는 대중문화의 장악력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의식 산업'이라 명명한 것들의 세계에서 주체적 삶이 평면화된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발전된 소비문화에 존재하는 사회적 소통의 불투명성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페티본의 작업은 마티스에서부터 리히텐슈타인에 이르는 선배 모더니스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한다.
드로잉에 대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의 접근법은 모체도 자소도 아니다. 그것은 지워진 선의 흔적들이 페이지에 남겨져 목탄의 흐릿하고 뿌연 자국을 형성하는 지움의 형식이다. 선 위에 선을 덧씌우는 소위 ‘펠림프세스트’ 기법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그리기 방식이기도 하다. 뤼피냑 같은 구석기 동굴에서는 그림 위에 층층이 덧그려진 동물화를 볼 수 있는데, 매머드 무리 위에 들소가 그려져 밑의 그림이 없어지는 식이다. 모체가 대상에 행하고 자소가 주체에 행했던 것을 펠림프세스트는 시간에 대해 행한다. 즉 펠림프세스트는 시간을 추상화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역사나 서사의 구성이 아니라 오히려 지우기와 덧그리기이다.
기계화된 그래픽 형태가 나오면서 수작업을 구닥다리로 만들어 버린 탓에 주검들의 지표로서 그려진 윤곽선이 드로잉의 퇴락을 인정하는 한 방식이 됐다면, 켄트리지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선진 테크놀로지의 압박을 받은 미술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성찰이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때때로 테크놀로지의 위협에 직면한 다양한 예술 매체는 그 매체 자체에 유토피아적 기대가 있었던 매체의 초기 역사를 떠올린다고 한다. 켄트리지의 경우는 초창기 영화의 형식을 상기시키는 작업을 했다. 그 시절에는 주트로프나 페나키스토스코프의 회전하는 드럼에 붙여 놓은 작은 드로잉들이 집단적 경험을 가능하게 했으며 사적인 소비자를 집단적인 관람자로 변형시켰다.
▼ 「망명 중인 펠릭스 Felix in Exile」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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