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지가 잭슨 폴록에 대해 "그가 미국의 가장 위대한 생존 화가인가?"라고 묻는다. 잭슨 폴록의 작품이 선진미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세간의 주목을 받기
《라이프》지의 사례는 서로 다른 두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폴록의 드립 페인팅을 조롱조로 논하던 미술 전문지는 조심스럽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주목과 제도적 성공에 힘입은 폴록은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성공은 오히려 그를 위기에 빠뜨렸다. 1950년 여름, 최고의 유명세를 누릴 만큼 누린 폴록은 네 점의 대작, 「하나(31번, 1950)」,「라벤더 안개」, 「가을 리듬」, 「No.32」를 완성했으나 이후 추상에 대한 그의 의지는 좌절됐다. 그 후 그의 초기 미술 당시 구상화로 되돌아가고 알코올 중독도 재발하며 작업 부진에 크게 상심한 그는 1956년 여름 자동차로 나무를 들이받고 사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했다.
폴록 내면에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의 가치가 서로 경쟁하고 갈등했다면,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도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갈등이 존재했다. 그의 작품은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모더니즘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해석에서의 이와 같은 갈등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갈등으로 인해 추상의 의미 및 심지어 그 가능성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맞붙게 되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폴록의 미술이 표면을 공간적으로 압축했다고 호평했다. 회화 표면을 따라 뻗어나간 이 평면성은 가상의 환영적인 공간을 지닌 이젤 회화를 마치 거대한 벽화처럼 변형시켰으며, 이것을 관찰 가능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연구하는 근대 과학과 연결된다. 폴록의 이런 평면성은 아직까지 구상과 양립할 수 있었다.
40년대 말에 이르러 과학적 모델이 아니라 반영적 모델을 채택해 모더니즘을 다시 독해하기 시작한 그린버그는 추상의 필연성을 재검토했다. 이제 시각예술은 실증주의 과학을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시각예술에서만 가능한 경험적 근거, 즉 시각 자체의 작용을 모델로 삼았다. 요점만 말하면 이 시각 자체의 작용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가장 원대한 야심은 보는 행위에 관련된 고유한 의식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다. "실체를 완전히 광학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기의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요소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반환영주의가 완성된다. 사물들의 환영 대신에 양상들의 환영이 나타난다. 즉 물체는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이 오로지 신기루처럼 광학적으로 존재한다."
오직 보는 행위만을
따라서 "환영에 대항해서 오로지 빛"만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루 같은 즉자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됐던 폴록의 얽히고설킨 드립 페인팅은 새로운 임무를 떠맡게 됐다. 그 임무란 대상을 분쇄시키는 것, 그린버그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상을 "증발"시키는 것으로 오로지 대상의 효과만을 추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비물체적인 무중력 상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 순환하는 얽히고설킨 선들은 안정된 윤곽선 같은 것은 전혀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야의 초점이나 구성의 중심을 흩트려서 감각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선은 일종의 빛으로 이루어진 환경을 창조하기 위해 사용됐는데, 이것은 전에는 색이 맡았던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그린버그와 그의 동료 마이클 프리드의 주장대로, 이렇듯 선과 색의 구별을 없애거나 중지시킨 폴록의 선 그물망은 현실의 조건을 초월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추상의 종착지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프리드가 언급했듯이 폴록의 선은 "어떤 의미에서 오직 보는 행위만을"드러내고 경계를 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폴록은 비구상적인 추상 작품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상을 그리려는 야심이 회화 영역에서 구조적으로 가능했을까? T. J. 클라크가 수행한 두 번째 '구상적인' 해석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클라크는 폴록이 '닮음꼴', 즉 구상은 단지 재현적인 클리셰를 반복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추상에 대한 야심을 품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나"라는 제목을 빈번히 사용한 사실에서 클라크는 폴록이 절대적 일체성(wholeness) 또는 절대적 선차성(priorness)을 성취하길 원했다고 추론했다. 절대적 일체성이란 화면이 재현의 여러 단위들로 분화하기 이전의 일체성이며, 절대적 선차성은 선사시대 동굴 벽에 찍힌 손자국처럼, 어떤 흔적이 그 최초의 제작자의 현전을 나타내는 지표에서 그 현전의 재현이나 이미지나 형상으로 변형되기 이전의 선차성이다.
클라크는 폴락의 구름 같은 소용돌이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았는데 이 이미지는 질서나 일체성의 이념의 은유일 뿐 그 이념의 추상화가 아니다. 그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은유의 조건과 싸우고 있는 폴록을 발견한다. 따라서 클라크에 따르면 폴록의 미술은 실패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가 더 이상 구상 바깥의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됐을 때 그의 끈기는 소진되기 시작했다. 이런 우려는 1950년 여름에 현실로 나타났다. 이때 폴록의 작품 중 특별히 크고 권위적인 것들은 줄곧 그 곁에 도사리고 있던 단일성의 은유에 완전히 굴복하고 만다. 「가을 리듬」, 「라벤더 안개」, 「하나」에서 볼 수 있듯이 폴록의 그림들은 자연의 그림이자 비밀스럽고 거대한 풍경화가 돼 버린다.
총체적 "하나"
과연 클라크의 말처럼 과정을 보여 주는 지표나 흔적인 은유로 합쳐질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프로세스 아트 작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60년대 말 로버트 모리스가 주장한 것처럼 "추상표현주의자 중에서 오로지 폴록만이 과정을 회복시켰고, 과정이 최종적인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임을 주장했다. 폴록이 과정을 회복시키면서 미술 제작의 재료와 도구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됐다."
회화를 다시금 수평적 장으로 되돌림으로써, 폴록은 직립, 게슈탈트, 형태, 미 같은 모든 숭고화하는 힘에 맞서 싸웠다. 적어도 폴록 작품의 반형태적 충동을 확신했던 다수의 미술가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폴록의 캔버스가 작업실이나 미술관의 벽에 수직적으로 걸림으로써 다시금 형태적인 장식성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접지 않았다. 이들 미술가들이 보기에, 클라크가 지적한 과정의 흔적들(물감을 이겨 바르기, 표면을 얼룩지게 하기, 캔버스를 따라 물감이 스며들게 하기)은 모두 수평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끊임없이 작품의 직립성을 붕괴시켜 작품이 이미지로 한꺼번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폴록 이외에 다른 모든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이젤을 사용하거나 캔버스를 벽에 고정시켜 놓고 작업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데 쿠닝이나 코르키의 작품에서는 물감이 수직적으로 흘러내리는 형태를 띠면서, 흩뿌린 자국이 그 자체로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오직 폴록만이 이에 저항했고, 이런 저항은 작품을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그 자체로 유지된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하나의 수평적 반형태이며, 수직적 '하나'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은 추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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