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트 몬드리안이 「승리 부기-우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 작품에서 회화를 통해 파괴라는 관념을 추구했던 몬드리안 고유의 기획이 실현된다.
1942년 6월부터 제작하고 있던 미완성의 「승리 부기-우기」는 작업실 벽면의 채색된 직사각형들의 깜박임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연속성은 이젤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그림에서 고전적 신조형주의의 검은색 선을 비롯하여 모든 선들이 제거됐다는 사실로 인해 특히 강조됐다. 캔버스에 풀로 붙여진 조그만 직사각형 색종이들은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일렬로 배열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배열조차 곧 붕괴될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관람자는 실제로 그 배열을 보고 있다기보다는 구성 전반에서 그것을 추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몬드리안은 이 작품을 가지고 18개월이나 씨름을 하였다. 죽음에 임박했음을 예상한 몬드리안은 평생 견지해 온 목적론적 성향에 걸맞게 이 그림이 자기 생애의 최후의 작품이라면 과거의 모든 시도들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몬드리안의 고전적 신조형주의를 추종했던 이들에게 그가 남긴 최후의 콜라주는 파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들은 옳았으며, 놀랍게도 몬드리안 자신도 이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다. 몬드리안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그런 파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괴는 줄곧 몬드리안 작업의 핵심이었다.
결코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몬드리안은 고요한 평형 상태의 구성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성이 자신의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이 되는 역동적인 진화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키지 못했고 결국 그간의 성과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0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몬드리안은 자신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파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화의 언어, 심지어는 자신의 언어 그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표현 그대로 '용해'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평면이었다. 이를 위해 몬드리안은 작품의 '고전적' 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1919년부터 금기시해 온 '반복'이라는 요소를 재도입했다. 그에게 그저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했던 반복은 이제 정체성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재등장했다. 그는 여러 개의 선을 반복함으로써 평면의 경계를 한정하고 그 평면들을 연결시켰다. 그 결과 "평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오로지 리듬만 남게 된다." "고전적" 신조형주의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던 선들이 이제 가장 강력한 요소이자 중요한 파괴의 요소로 떠올랐다. 선을 중복시키기만 하면 평면은 반드시 '개체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여러 윤곽선을 가진 하나의 평면을 구분해 내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는 그 선들마저 "정체성을 잃게"됐다.
미학적 파괴 행위
몬드리안 고유의 획기적인 회화 기획이 최초로 실현된 작품은 지난 2년간 절정에 이른 연작과 구성이 동일한 「구성 B」(1932)였다. 「구성 B」 이후 3년 동안 몬드리안은 1930~1932년에 제작된 고전적 유형의 작품들을 토대로 자신의 기존 회화 언어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30년대 후반에 다음 단계로 넘어간 몬드리안은 '다중선'들을 TV의 가는 주사선처럼 훨씬 많이 사용하여 캔버스 전체에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 냈다. 흰 바탕에 오직 두 줄의 검은 선만 사용할 만큼 한때는 텅 비었던 화면을 이렇게 점진적으로 채워 나가던 몬드리안은 예기치 못한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됐다. 첫째, 1917년 이래 그가 금기시한 중첩 효과가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선의 두께를 다양하게 하여 이 효과를 심화시켰다. 둘째, 다중선들이 교차하면서 그의 작품은 1919년 이후 그가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시각적으로 깜박거리는 효과를 다시 내게 됐다. 환영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이런 금기들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이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인 듯했다.
몬드리안은 이렇게 다양한 두께의 선들을 반복함으로써 망막에 남은 잔상을 동요시키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몇 개의 선을 부분적으로 토막 내서 그 선들이 더 이상 화면을 분할하는 선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이렇게 토막 난 선들의 상호작용 결과, 눈앞에서 형성되는 동시에 사라지는 덧없는 가상의 평면이 만들어졌다.
30년대 초, 다수의 선들을 교차시켜서 직사각형의 평면을 '용해'시켰다면, 30년대 후반에는 한층 더 강도 높은 반복을 통해 선 자체의 정체성마저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과 평면이 머물고 있는 바탕은 기본 요소들과의 이런 한판 승부에서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제 몬드리안은 기하학적이고 물리적인 실체인 바탕을 소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 결과 「뉴욕 시」의 망 같은 색선들의 조직(적색 망, 황색 망, 청색 망)은 독립된 가상의 평면마저도 재구성하기 어렵게 됐는데, 어떤 색선의 망도 일관된 방식으로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끝 부분을 보면 빨간색 선이 노란색 선 위에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아래 놓인다.) 그러나 이렇게 기하학적으로 정의되기 어려운 공간이 가능했던 것은 균질하지 않은 바탕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몬드리안이 일부러 그림의 구성의 초안이 된 색 테이프 띠의 위아래를 임파스토와 힘 있는 붓질로 따라 그렸기 때문에 이 작품은 여러 층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걸작으로 평가받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3)도 몬드리안이 보기엔 실패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는 과거의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작품만큼 그가 좋아했던 재즈의 당김음 리듬의 생동감을 적절히 포착하고 있는 그림은 없었지만, 여기에는 「뉴욕 시」의 작품 같은 조직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뉴욕 시」에서 다수의 색선들이 교차하면서 예기치 못한 동시대비 효과(깊이감의 환영을 만드는 보색대비)가 유도됐다면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몬드리안은 그런 효과를 수정하기보다는 그것에 형태를 부여했다. 그는 화면을 지배하는 황색 선 위에 서로 다른 색의 사각형 색점을 찍어서 선들을 분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서 바탕은 강력한 통합의 위력을 발휘하며 재등장했다.
몬드리안은 '완성된' 상태의 「승리 부기-우기」에서도 이런 문제로 곤혹스러워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붙인 자국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칠게 색종이 조각을 작품에 덧붙였던 것이다. (환영이 아닌) 실제 공간을 칼로 베어 낸 듯한 이 콜라주에서 두껍게 직조된 모든 요소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바탕은 그 존재 양태가 떠도는 것일 수밖에 없는 유령이 되며, 그렇게 형상 위로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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