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파르티잔 리뷰》의 편집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미국 아방가르드의 비정치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1942년 7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술가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 1907~1959)은 1942~44년에 발행된 멕시코의 국제적 잡지 《딘(Dyn)》 2호에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질문」이란 글을 기고했다. 팔렌이 24명의 "저명한 학자와 저술가"에게 보낸 3개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1) 변증법적 유물론(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은 "정말로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과학"인가? (2)(마르크스주의의 전유와 무관하게) 헤겔이 공식화한 변증법적 방법론은 과학적이었나? 그렇다면 "과학의 중요한 발견들은 이 방법론에 빚지고 있는가?" (3) 변증법적 방법론의 토대가 되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확립된 법칙들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유효한 것인가?
브르통의 의도적 침묵
약 1년간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브르통은 1942년 4월에 발행된 잡지 《딘》 창간호에서 팔렌의 짧지만 신랄한 글 「초현실주의여 안녕」이 보여 준 배신행위에 충격을 받았다. 이 글에서 팔렌은 "1942년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고, 모든 이즘은 점진적으로 해체됐다."고 주장했다. 누구든 더 이상 초현실주의가 마르크스와 헤겔의 "교조주의적 개념"의 일부를 너무 쉽게 수용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팔렌은 인간 행위, 특히 창조적 행위의 주요 동기가 무의식적인 욕망이라는 프로이트의 원칙에 대한 초현실주의의 맹목적인 지지를 철회하면서, 미술이 물리학의 "성과 및 방법론"과 더 많은 유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조적이거나 엄격한 어떤 사유체계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다.
미국미술가협회
《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한 사람 중 일부는 러시아의 지도자 스탈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1934년 뉴욕에서 창간된 반스탈린주의 문예지 《파르티잔 리뷰》에서 편집자로 활동하거나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마이어 샤피로, 드와이트 맥도널드, 필립 라브,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포함돼 있었다. 30년대 초만 해도 대다수는 급진적인 정치를 옹호했고 이들이 잡지를 통해서 지지한 미술가들의 성향도 그러했다. 스탈린주의의 함정을 재빨리 간파한 브르통은 소련의 문화 정치를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예술의 자유를 방어하고자 했다.
뉴욕에서 미국미술가협회의 회합이 최초로 이뤄진 1936년 2월, 정치적 개입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 회합에서 샤피로는 「예술의 사회적 기초」라는 글을 통해 모더니즘(추상) 미술의 개인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부유한 딜레탕트 후원자 계급에 영합하는 정치적 도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브르통은 한 달여 동안 멕시코에 머무르면서 트로츠기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트로츠키가 6월 17일 《파르티잔 리뷰》 편집진에게 보낸 공개 서한은 1938년 8~9월에 발행된 특집호 "예술과 정치"에 수록됐다. 이 글의 결론은 심히 고무적이었다. "예술은 과학처럼 질서를 추구하지 않으며, 본성상 질서를 견디지 못한다...... 예술이 스스로 확신을 가질 때만이 혁명과 강력하게 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브르통이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거둔 주요 성과는 독립혁명미술세계연합의 결성을 촉구하는 선언문 「혁명 미술의 자유를 향해」였다. 이글이 전세계적으로 발표될 때는 공동 집필자인 트로츠키의 이름 대신 디에고 리베라의 이름을 명기했다. 이유는 트로츠키가 이 선언문에 지나친 비중이 실리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인데, 더욱이 이 선언문의 공동 집필자가 다른 정치적 진영에 속하면서 예술이 정치에 종속되는 상황을 비난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자신의 입장이 의혹을 살 경우를 대비해서 트로츠키는 《파르티잔 리뷰》 다음 호에 리베라와 함께 도움을 준 브르통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고 다음과 같이 재차 주장했다. "예술에서 혁명적 사고를 성취하려면 우선 예술적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유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변함없는 신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글은 30년 후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입장을 예견이라도 하듯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모두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가장 독특한 선언문이었다. 이 선언문이 예술계에 즉각적으로 끼친 영향은 굉장했다. 30년대를 회고하며 1961년에 쓴 글에서 그린버그는 다음과 같이 빈정거리기도 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반스탈린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위한 예술'로 변형됐으며, 결과적으로 대담하게도 이후에 올 미술 운동에 길을 열어주게 됐는지, 언젠가 얘기해야 할 것이다." 브르통과 트로츠키의 논문에 영향을 받은 그린버그는 1939년 가을 《파르티잔 리뷰》에 첫 번째 논문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수록했다. 여기서 그는 모더니즘 미술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트로이 목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동시에 야만성에 대항한 최후의 보루라고 분석했다. 공산주의 성향의 조직에 몸담고 있었으나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재판에 망연자실한 좌파 미술가들에게 그린버그의 글은 그 무기력한 마비 상태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미술가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술을 혁명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됐다.
뉴욕에 재집결한 초현실주의자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럽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뉴욕에서 새롭게 전열을 정비한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젊은 세대의 미술가들뿐이었다. 이후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초현실주의 미술을 다루는 전시가 열리고 잡지를 통해 명성을 쌓아 1942년 가을이 되자 초현실주의의 대중적 인지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화려한 활동 뒤에는 일종의 권태로움이 운동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브르통은 이를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젊은 세대가 선보인 미술은 탕기가 만든 가상의 풍경들, 마송의 '자동기술법적'인 제스처를 추종하는 아류임에 분명했으며, 고참들은 이미 얻은 명성에 안주했다. 이제 막 초현실주의에 뛰어든 마타만은 그렇지 않았다. 브르통은 1937년 26세의 건축학도인 마타를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희망으로 점찍었다. 특히 공상 소설에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배경에서 부유하는 생물/기계 형태적인 형상들을 담은 그의 드로잉에 이끌렸다. 1940년 무렵 마타는 이런 드로잉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거대한 회화 작품으로 옮겼다. 합리주의와 원근법 체계를 따르는 고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꿈속에 나올 것 같은 비이성적인 형상 간의 충돌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핵심이었다. 마타는 탕기나 달리의 미술을 매혹적으로 만들었던 주요인인 까다로운 눈속임 기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타는 이런 아카데믹한 작업실 작업의 제약에서 벗어나 고도로 통제된 독특한 무대를 배경으로 제스처나 자동기술법을 구사했다. 언제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독재자였던 브르통은 뉴욕 미술계에서 승승장구하는 마타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는 우연히 아르메니아 태생의 화가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 1904~1948)의 작품 「간은 수탉의 볏이다」을 발견하고 고르키를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고르키의 초현실주의에서 추상표현주의로
그는 피카소(형태와 윤곽의 분리), 미로(생물 형태), 칸딘스키(채도 높은 색상), 마티스(아래가 비치도록 채색하여 밑칠한 부분이 나름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마타(공상과학 소설에 나올 법한 풍경과 아메바 모양의 장식들), 심지어는 뒤샹(고르키가 매우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는 뒤샹의 「큰 유리」이다.)에게서 얻은 교훈에, 역동적인 제스처의 흔적을 남기는 모든 요소(여기에는 무수한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도 포함된다.)를 새롭게 추가했다. 고르키는 1948년 자살하기 전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해 나갔다. 당시에 그의 작품이 초현실주의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브르통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록이나 뉴먼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맹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고르키는 브르통의 칭찬에 우쭐했고, 그에게 작품 제목을 정해 달라고 하여 보답했지만 초현실주의 그룹의 충실한 회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브르통의 제안은 거부했다. 그의 권유가 도를 지나치자 1947년 고르키는 브르통과 결별을 선언했고, 고르키의 이탈은 초현실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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