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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1940년대 노트

1944년b 전후 근대미술의 거장들의 양식, 마티스, 피카소, 보나르, 모란디

by 책방의 먼지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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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보나르 같은 근대미술의 '거장'들은 야만성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떠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문다. 전쟁 중에 거장들이 발전시킨 양식이 전후에 알려지면서 신세대 예술가들을 자극한다. 

 

간극을 메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티스 '초기'(「생의 기쁨」 이후부터 니스 시기 이전까지)의 완숙한 양식과 '말년'양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그러나 후기 작품군의 경우 검고 굵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형상 주변의 색칠되지 않은 흰 부분이라든가, 붓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캔버스의 여백의 빛처럼 눈에 띄는 자발성의 징후들이 드러난다. 이렇게 후기 작품에 자유로움의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넣는 요소들은 1935년경 마티스가 발전시키기 시작한 예술 철학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마티스가 자신의 새로운 접근법을 규정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무의식'이었다. 그의 무의식 개념은 프로이트 학설의 억눌린 욕망과는 거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이 단어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마티스의 '무의식'은 오히려 그가 간혹 언급한 것처럼 '반사작용'에 가깝다. 그가 '무의식에 의지한다는 것'은 단 두 단계의 작업 과정을 택한다는 의미였다. 드로잉에서 처음으로 이 기법을 발전시켰는데, 일단 마티스는 끈기 있게 모델을 연구하는 "분석적 습작"(대개 목탄으로 그린 것으로 수많은 수정의 흔적이 있다.)이라 부른 과정을 통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익혔다. 그다음 누적된 정보들이 포화 상태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 선 드로잉이 거침없이 풀려 나왔고 순전히 본능에 이끌려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수정의 여지가 없는 드로잉을 했다.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적 자동기술법을 고안했고, 이를 통해 구상한 것과 실제 구현된 것 사이의 간극을 소멸하고자 하는 마티스 일생의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티스는 잠시 몸져누웠을 동안의 5년간 색종이 작업을 하였는데 회화적 자동기술법처럼 색종이 작업도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해결하고자 했던 딜레마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구상한 것과 구현된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의 결과인 "드로잉과 색채 사이의 영원한 갈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영원한 갈등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불평했고, 「생의 기쁨」에서처럼 야수주의의 색채 폭발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직접적으로 색채를 드로잉"함으로써 마티스는 수십 년간 자유자재로 구사해 온 두 가지 힘의 원천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선 드로잉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흰 바탕과 놀랍도록 충만한 색채 사이의 거리를 조율한 것이다. 

 

모더니즘 거장들의 '말년' 양식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명성을 얻고 오랫동안 근대미술의 개척자로 추앙받아 온 화가들의 미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예상외의 쇄신을 보여 주었다. 

피카소는 새로운 세대에게 가장 의미심장한 장애물이었다. (폴록은 이 스페인 예술가가 모든 것을 이미 다 창안해 버렸다고 탄식했고, 1947년 드리핑 기법을 창안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배 예술가의 마법에서 풀려났다.) 60년대 중반까지 피카소의 양식은 전쟁을 기점으로 변화를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가지각색의 양식을 선보였다. '현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후기 방식은, 피카소가 마침내 영광을 돌리게 된 영원한 라이벌 마티스와의 (직접적이지만 사후에 이루어진) 대화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1955년의 「알제의 여인들」과 1955년의 「'라 칼리포니'의 화실」에서 그는 분명 세상을 뜬지 얼마 안 된 마티스를 염두에 두었다. 이 작품들은 피카소가 서양의 회화 전통을 탐구한 이후의 연작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진지하다. 마티스의 죽음으로 피카소의 세계는 회복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언젠가는 죽을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점점 더 필사적으로 그가 이해하고 있는 회화가 여전히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데 여생을 바쳤지만, 60년대 초반이 되자 네오아방가르드 현상은 앞으로 기대되는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버렸고 젊은 예술가들에게 피카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파블로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H형)Women of Algiers(version H)」 1955

브라크의 '실내'연작에서는 피카소가 1955~56년에 보여 준 '마티스적'인 회화와 구조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근본적으로 실내 정경의 구성은 아카데미화 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표준적인 입체주의의 색채와 형태의 분리, 다시점, 투명성, 대상을 여러 면으로 분해하기 등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유별나게 큰 작품 크기는 브라크가 대상의 완고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물감과 모래 혼합물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의 40년대 '실내' 연작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회화가 이젤화의 사적이고 친밀한 규모에서 돌연 벽화의 규모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조르주 브라크 「당구대 The Billiard Table」 1944

보나르는 후기작에서도 30년대 중반 이래 이미 나타났던 특징들이 계속해서 보인다. 작품 크기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붓놀림은 한층 자유로워졌다. 전반적으로 형태가 흐려진 것은 보나르의 강도 높은 색채의 울림을 더욱 크게 했고 그가 수십 년 동안 묘사해 온 가정적인 세계를 몽환적인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피에르 보나르 「미모사가 보이는 작업실 Studio with Minosas」 1939~1946

 

대조적으로 레제의 작품세계는 후퇴했다. 일찍이 20년대 중반부터 레제는 한참 후에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한 이른바 '이젤화의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몇 안 되는 모더니즘 화가였다. 또 그는 회화란 그 자체만으로는 사라질 운명이며 회화의 생존은 다른 매체와 어떻게 융합하여 새로운 단계의 감각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적 그 자신은 이데올로기에 충성했다. 

 

새로운 세대의 세상이 열리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레제를 무시했다. 파리 화파의 몇몇 상징적인 거장들에게 찬사를 보낸 후 비엔날레는 파시즘 정권하에서 의도적으로 묵살당한 또 다른 예술 운동인 초현실주의로 관심을 옮겼고(1954년 회화 부문에서 막스 에른스트가, 조각 부문에서는 한스 아르프가 대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에 마침내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을 조명했다. 당시의 새로운 세대란 전후 추상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비엔날레가 과거 미래주의의 정치적 범죄를 사면하려는 시도를 하기 2년 전인 1948년, 카를로 카라, 조르조 데키리코,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를 중심으로 한 그룹 전시에서 형이상학 회화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밖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 인사 모란디가 갑자기 유명세를 탔다.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그의 예술 세계는 은둔 생활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20년대 초 이래 형성된 것이었다. 보통은 회색의 달인이라 불릴 정도의 색조와 선명한 빛(위에서 빛을 비춰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도 하고, 비스듬히 빛을 비춰 데 키리코의 초기 양식을 연상시키는 강조된 그림자를 만들기도 했다.)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과묵하고 낮은 목소리를 내는 모란디의 작품이 20세기 내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연달아 일어난 수많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활기찬 주장과 함께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모란디는 이른바 단색조를 택했는데, 여기에서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논쟁적인 수사학과 페이소스가 사라지고 작품을 오래 응시해야만 비로소 작품의 의미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관람자들이 모란디의 고요한 작품 세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 이 볼로냐의 은둔자는 후배 미술가들에게 회화가 여전히 해볼 만한 작업이라고 설득하는 데 전후 피카소보다 더 많은 공헌을 했다. 

 

조르조 모란디 「정물 Still Life」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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