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터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의 초안을 마련하고, 앙드레 말로는 "벽 없는 미술관"을 구상하며, 마르셀 뒤샹은 「여행용 가방」의 제작에 착수한다. 사진을 통해 예술 영역에서 표면화된 기계 복제의 충격이 미학 이론, 미술사, 작품 제작의 관행에서도 감지된다.
시대의 얼굴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사진과 영화의 문제를 다시 다루었을 때, 그 분석은 더 이상 계급이 아닌 생산 방식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작품의 사용가치는 더 이상 그것이 생산된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 원시 사회에서는 생산의 조건들은 손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동체의 시야 너머에서 작동하기도 하는 이와 같은 '제의가치'는 단순한 복제품이나 모조품에는 존재하지 않는 치유의 능력 때문에 신성하게 여겨지는 대상의 진품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본 작품을 판화로 복제하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미술품에는 제의가치 이외에 '전시가치'라는 새로운 용도가 더해졌다. 이런 형태의 복제품은 원작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예술 작품과 명확히 구분됐다. 벤야민은 이런 지위를 작품의 "아우라"라고 명명했고, 그것은 결코 전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을 의미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생산 조건이 급변하면서 모체나 '모형'을 써서 대량생산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이미지 세계에 처음 도입된 대량생산 방식은 석판화이지만, 완벽한 기계 복제 양식이 된 것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찍을 때도 인화할 때도 수작업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원판 필름이 완성된 이미지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진은 더 이상 '원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은 원본 없는 복제품이었다. 벤야민이 썼듯이 "사진은 그 원판 필름만 있으면 몇 장이든 인화할 수 있다....... '진짜' 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벤야민은 "대상을 그 껍질로부터 떼어 내는 일, 다시 말해 대상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서 동등함을 발견'하려는 지각 작용의 표지이며, 이런 지각 작용은 복제를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무이한 대상에서조차도 동등함을 이끌어 내는 데까지 증대된다." 그러므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생산(기반)의 계열화는 시각의 계열화를 초래하며, 이는 다시 상부구조라 할 수 있는 예술 작품 자체 내의 계열화에 대한 취향을 불러일으킨다. 생산방식에서 '사용가치'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면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예술 작품의 복제 정도가 커지면서 복제를 의도한 예술 작품이 제작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제를 의도한"작품을 제작하는 미술가들(뒤샹부터 워홀에 이르는)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생산 방식의 변화가 과거의 모든 미학적 가치를 일소할 것이라는 벤야민의 예견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언급에 따르면 "사진이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할애됐던 과거의 노력은 무용하다...... 사진의 발명이 예술의 본성 전체를 바꾼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오히려 더 핵심적이다."
벽을 떠난 미술관
프랑스 소설가이자 좌익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 또한 매체가 "예술의 본성 전체"를 변형시킨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결론은 벤야민과 반대였다. 사진으로 복제되는 과정에서 "원작은 사물로서의 고유한 속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견해는 잃어버림에 대한 부분에서 차이가 생기는데 말로는 "동일한 방식으로 원작이 양식이라는 최상의 가치를 획득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사진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대상을 양식적으로 동질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며, 이것이 "우리 시대 미학"의 특질이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우리는 세계 미술에 대한 정보를 집약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요약본인 미술책은 바로 말로가 "벽 없는 미술관"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반물질적인 제작 과정이 발생하는 동시에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이미지의 가상성으로 환원하려는 욕구가 등장한다. 이후 이런 욕구는 심화되어 실제로 상상의 박물관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도달 가능한 것이 되며, 그 가상적 원천은 이제 미술책이 아니라 인터넷이 된다.
미술책의 주된 기능은 예술 작품들을 사진으로 복제해서 열거한 결과 작품이 '대상'에서 '의미들'로 새롭게 기호화됐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술책은 기호 작용과 연관된 기계이며 사진은 그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은 가장 용이한 방식으로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작품 간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를 변별하는 경험을 분리하여 한 작품에만 한정된 관조의 경험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입증한 거처럼 한 작품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통해 발생한다.
예술을 다수의 의미가 중첩된 방대한 기호 체계로 보는 이런 시각은 말로가 초기에 쓴 글 중 하나인 1922년의 전시 서문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 ...... 그리스 조각의 위대함을 이해하려면 수백의 그리스 조각들을 보느니 차라리 그것을 이집트나 아시아의 조각과 비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말로는 이런 경험을 통해 형태를 아름다움의 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 오히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는 방법을 습득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스위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고전주의는 오로지 바로크 미술과 대조될 수 있는 비교 체계를 통해서만 '읽힐'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절대적 기준(고전미술의 아름다움)을 상대화시켰다. 그런 비교 독해를 위해 뵐플린은 촉각과 시각, 평면과 삼차원적 깊이, 그리고 폐쇄된 형태와 개방된 형태 등과 같은 형식적 대립 쌍을 구축함으로써 형태를 언어학적인 기호로 전환했다. 형태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 가치 있기보다 오히려 체계 내에서 다른 형태들과 대조되면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어떤 대상을 미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의미의 문제가 된다.
미술은 오로지 상대적으로 읽힐 수 있는 기호들을 양상하고 비교로 인해 이전 미술에 존재하던 중심성과 위계는 해체된다. 그 이유는 비교가 동양 대 서양, 고급문화 대 허위문화, 궁정 미술 대 대중 미술, 북방계 대 남방계와 같은 모든 체계의 병치를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은 의미 작용에 소용되는 요소들을 작품의 복합체로부터 파편화하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독해에 결정적인 수단이 된다.
말로의 이런 방대한 연구가 압축된 결과물은 1951년에 출판된 저서 「침묵의 소리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독해를 가능하게 한 '글들', 다시 말해 그가 "허구"라고 불렀던 것들은 침묵하는 예술 작품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 체계로의 전환은 복제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의 자리를 메우며, 덕분에 이런 형상들이 잃어버린 "원작(대상)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예를 들어 종교적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로는 "우리는 오로지 예술 작품으로서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제작자들의 재능에만 주목하게 될 뿐이다."라고 단정했다.
벤야민은 "기계 복제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은 예술 작품의 아우라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말로는 그것이 어떻게 전환됐는지에 관계없이 아우라의 개념을 고수했다. 말로가 "예술의 영혼"이라고 불렀던 것은 미술책에서 만들어진 "허구"를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복제를 통해 자유로워진 예술의 영혼은 본연의 이야기를 구사한다. 그 목소리가 작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원'본
벤야민과 말로가 1935년에 예술의 운명을 복제라는 측면에서 숙고했다면, 뒤샹은 같은 해 나름의 벽 없는 미술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5년에 제작되기 시작한 「여행용 가방」, 미술관 전시를 여행용 가방 크기로 축소시킨 이 '미술책'은 외판원이 상품 견본을 넣어 다니는 가방과 유사하다. 여기서 말로의 인상적인 표현 "침묵의 소리들"은 광고 소음으로 변형되고 "미술의 영혼"은 상품성으로 재편성된다.
이후 5년간 뒤샹은 노동 집약적인 콜로타이프 인쇄 방식을 동원해 자신의 작품을 공들여 복제했다. 미술가 자신이 직접 복제품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이 복제품들은 '채색 원본'이었다. 그중 일부는 뒤샹의 사인을 포함하고 있거나 공증을 받았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변형된 미학적 지위를 갖는 '원'본들이었고 특히 레디메이드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복제품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원작과 복제품은 마주보는 거울의 끝없는 원근법처럼 서로의 위치를 뒤바꾼다. 여기서 뒤샹은 지품의 지위를 보증하는 미술가의 수작업으로 돌아감으로써 벤야민의 견해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말로가 말한 "위대한 창조자"의 영혼을 끝없이 계속되는 강박적인 반복 속에 가둠으로써 말로의 견해 또한 부정했다.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의 말처럼 이 작품은 "일관되게 뒤샹의 작품을 집대성함으로써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여기서 "뒤샹은 집요하게 지속되는 반복 강박(프로이트가 무의식적인 죽음 충동과 삶(Eros)의 본능을 연관시켰던 그 반복과 동일한)의 형식을 통해서 유기체와 비유기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를 재현한다. 복제의 행위는 자아를 구성하는 동시에 파괴한다. ...... 그가 발견했던 자신은 바로 다름 아닌 레디메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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