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토 자코메티, 살바도르 달리, 앙드레 브르통이 "상징적으로 기능하는 오브제"에 대한 글을 잡지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에 게재한다. 초현실주의가 물신주의와 환상의 미학에서 오브제-만들기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전통적인 조각에 대한 도전은 원시주의 미술가들의 부족 물건, 그리고 뒤샹이 레디메이드에서 사용한 일상용품의 두 형태로 진행됐다. 이 둘은 모두 일종의 물신적인 힘을 소유하거나 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듯 보였다. 부족의 물품이 그 자체로 특별한 생명력이나 주술적 힘을 지닌 제의적 대상으로서의 물신을 연상시켰다면 레디메이드는 상업적 생산물로서의 물신, 즉 상품 물신을 연상시켰다. 마르크스의 고전적인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이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물에 자율적인 삶과 힘을 부여하고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물신화시킨다. 부족의 물건이 상품 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경제밖에 있기 때문에 매혹적이라면, 레디메이드가 도발적인 이유는 현대미술도 다른 생산품처럼 전시와 판매를 주요 목적으로 하는 상품 경제에 구속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점에 있다. 모더니즘의 오브제-만들기에서 이와 같은 부분적인 유형학은 성이라는 세 번째 물신을 끌어들인 초현실주의 오브제의 출현에 의해 확장될 수 있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오브제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를 자세히 공부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들이었지만 이들이 1927년에 프로이트가 물신주의에 대해 쓴 글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프로이트에게 물신은 어머니에게 없는 페니스의 대체물이다. 어머니에게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남자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느낀다. 따라서 아이는 신체의 전체성에 대한, 그리고 남근적 권력에 대한 그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페니스의 대체물에 기대게 된다. 따라서 물신주의는 남성 주체가 거세 또는 그와 같은 외상적 상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부정하는 일종의 이중적 실천이다. 이 이중성이 주체를 분열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물신을 이중적인 대상으로 분열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언급했듯이 물신은 대개의 경우 "적대감"과 "애정"을 동시에 가리키며, 물신으로 옮겨진 성적 욕망과는 별도로 대단히 난처한 사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낀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지와 오브제를 통해 이를 드러내려 했다. 자코메티의 작업을 비롯하여 초현실주의 오브제는 거세에 대한 불안과 물신을 통한 방어를 잘 보여 준다. 그의 「매달린 공」에서는 성별의 차이를 나타내는 거세를 지연시키거나, 적어도 성적인 암시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의 오브제는 두 개의 「기분 나쁜 오브제들」(1930~31)처럼 물신을 통해 거세를 부인하는 듯 보이거나, 「목 잘린 여인」(1932)처럼 "사지가 절단된 생물에 대한 공포나 그것에 대한 경멸감"(프로이트)을 통해 여성적 표상들을 가학적으로 처벌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몇 년 동안 자코메티는 물신주의의 심리적인 이중성을 오브제-만들기를 통한 상징적 모호함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잡지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 1931년 12월호에 자코메티는 「소리없이 움직이는 오브제들」이라는 제목으로 일곱 개의 사물을 스케치했다. 이 기이한 제목은 욕망을 가지고 두려운 낯설음의 상태로 살아 움직이지만, 억압으로 인해 침묵하는 사물을 연상시킨다. 이 드로잉에서 손은 남근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치 욕망의 대상(토템 동물이건 성적 대상이건, 아니면 예술 작품이건)을 만지는 금기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 즉 이런 작업들의 이중성을 구조화하는 욕망과 금기, 위반과 법 사이의 상보 관계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메렛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은 1936년 찻잔과 차받침, 숟가락 가장자리를 모피 털로 덮어 가장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오브제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 브르통은 「모피 위의 점심」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정물인 동시에 누드 작품인 「모피 위의 점심」은 구강 에로티시즘에 대해 이중적인 방식으로 장난을 치면서 여성의 성기를 음란하게 암시하고, 이를 통해 티타임의 예법을 재치 있게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프로이트식의 물신을 비웃고 지나침을 통해 조롱하며, 남성 관람자를 앞에 두고 물신이 지닌 남성적 편견을 내던져 버리는 듯 보인다. 우리는 이 정교하게 연출된 농담 속에서 역전돼 버린 권력의 희열을, 자신의 가학적인 책략을 통해 즐거워하는 모피 입은 비너스를 발견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듯 가학적인 입장은 곧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인 피학적인 입장으로 바뀔 수 있는데, 이런 역전은 오펜하임이 1936년에 만든 또 다른 물신 「나의 유모」에서 드러난다.(이 제목은 물신주의가 젠더나 언어 특수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1926년 글에서 프로이트는 중국 여인의 전족을 물신에 대한 경멸과 숭배가 혼합된 예로 보여 줬다. 오펜하임은 고전적인 물신인 흰색 하이힐을 뒤집고 끈으로 결박하여 남성의 가학성과 여성의 피학성에 대한 일종의 증거처럼 제시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구두의 굽을 장식술로 꾸미고 그 구두를 은쟁반에 담아 대접하여, 마치 피학적 입장의 즐거움을 통해 가학적 입장을 타도하는 듯 보이다.
잃어버린 대상
1936년경 물신 개념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오브제를 조작하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상투적인 표현이 되기 시작했다.
브르통은 살바도르 달리가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미술에 "의도를 갖고 결합"시켜 초현실주의 미술의 효과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했다. 브르통이 보기에 달리의 조작은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욕망의 흐름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르통 또한 욕망을 고정시키려 했다. 브르통은 모든 욕망에는 언제나 각각의 대상이 있고, 그가 벼룩시장에서 슬리퍼-숟가락을 발견한 것처럼 우연을 총해 그 대상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자크 라캉은 충족된 욕망이란 관념이 희망사항일 뿐임을 보여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필요(말하자면 아기의 욕구인 어머니의 젖)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어머니의 젖가슴)은 충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욕망의 대상은 정확히 말하자면 상실된 것이며 오직 환상 속에서만 재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성적) 대상을 찾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이며 라캉이 말했듯이 이렇게 대상을 다시 찾는 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대상은 허상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질 수 없고, 욕망은 결핍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충족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초현실주의적 대상이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욕망에 적합한 대상의 발견을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초현실주의에서 발견된 오브제를 다루는 역설적인 공식에 도달하게 된다. 즉 잃어버린 대상, 그것은 결코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쫒아야 되는 것이며, 언제나 대체물이고 스스로 자신을 추동한다.
환상을 상연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무대는 미국 작가 조지프 코넬(Joseph Cornell, 1903~1972)에 의해 가장 인상적으로 전개됐다. 오래된 비둘기 집이나 자동판매기 등을 모델로 한 그의 상자들은 새장과 게임판과 같은 모델을 받아들였고, 종종 두려운 낯설음의 것과 유행이 지난 것들을 초현실주의풍으로 섞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장난감"이 경이의 미학, 즉 모래와 별, 또는 비누거품과 달 지도가 함께 들어 있는 꿈의 공간을 창조할 때조차 그것은 놀라움보다는 웃음을 만들어 놨다. 상실을 다룰 때에도 그의 작품들은 상실을 외상적으로 만들기보다 노스탤지어를 통해 달래 준다. 따라서 코넬의 오브제들이 서로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기억이란 매개를 통해 주관성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상자에서는 욕망이 순환하고 어떤 상자에서는 이 욕망이 고독해 보이거나 자위하는 듯, 때로는 죽어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오브제들은 또 다른 목적지에 이른다. 그곳은 기분 나쁜 오브제들이 기분 좋은 잡동사니가 되어 버린 전시장이 아니라 주체가 유령처럼 자신의 욕망 주위를 맴돌고 있는 유물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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