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주 바타유가 <도퀴망>에 「원시 미술」에 관한 비평문을 쓴다. 이를 계기로 아방가르드와 원시주의의 관계, 그리고 초현실주의 내부에 존재하던 뿌리 깊은 분열의 기미가 표면화된다.
철학자, 사서, 포르노그래피 작가, 비평가, 그리고 이단적인 초현실주의 잡지 <도퀴망>의 편집자였던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초현실주의 "내부의 적"이라 불렀다.)가 심리학자 조르주 루케(Geroges Luquet)의 신간 「원시 미술(L'art Primitif)」에 대해 논평하기로 했을 무렵, 원시주의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더욱이 구석기 미술과 부족 미술 모두를 포함했던 '원시주의'란 용어는 종으로서 인류의 진화를 다루는 개체발생론, 혹은 윤리적 측면에서 새롭게 인식됐다. 예술의 기원에 대한 논의 또한 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 행위가 시작된 동굴이든, 그림에 대한 아이들의 욕구가 싹트는 현대식 유아원이든 관계없이 이런 범주에서 이루어졌다. 원시주의가 심리학은 물론 미학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원시'는 더 이상 퇴보나 퇴락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학에 국한되지 않고 발달 심리학의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인간의 인식 능력의 진화를 다루는 연구에 있어 "제1의 증거물"이 됐다.
폄하하기
「원시 미술」에 대한 논평에서 비타유는 2만 5천년 전의 동굴에서 발견된 것은 연못을 굽어보는 나르시스가 아니라 어둡고 현기증 나는 미로를 어슬렁대는 야수 미노타우로스였다. 다시 말해 아이의 낙서는 구성 충동이 아닌 파괴의 즐거움, 즉 무언가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즐거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파괴 충동은 사라지기는커녕 재현주의 단계까지 지속되며, 심지어 그림을 그린 사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기 훼손의 형태로까지 진전된다. 바타유가 지적하듯 구석기 동굴에 그려진 인간 형상은 사실적인 동물 묘사와 달리 일관되게 훼손되거나 왜곡된다. 이렇게 인간의 형상을 비하하고 폄하하려는 자기 훼손의 충동은 예술 행위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미술이 탄생할 당시의 상황은 형태(혹은 게슈탈트) 법칙이 아니라 그런 법칙의 거부인, 바타유가 말했던 '무정형(informe)'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미나 침과 같은"
1930년에 바타유는 <도퀴망>에서 미로의 작품을 "무정형적"이라 언급한 바 있는데, 실제로 바타유 그룹에 합류한 후 2년 동안 미로가 회화에 대해 가졌던 반감은 쓰레기통에서 수집한 오브제들로 구성한 소품에 못을 박은 콜라주 작품으로 형상화됐다.
이처럼 미로 자신이 '반회화'라 명명한 작품들에 대해 바타유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로는 회화의 속임수 상자 겉면 위에 무정형의 얼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구성을 파괴했다." 그러나 예술을 말살하는 동시에 예술가로 남을 수는 없다. 1930년과 31년 무렵 실제로 작업을 중단한 상태였던 미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회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 새로운 양식은 '도퀴망'다운 감수성을 가지고 인체와 '좋은 형태'를 공격하거나 부식시키는 것이었다.
원시주의 측면에서 훨씬 설득력을 지닌 것은 자코메티의 작품이다. 조각가로 성장하던 자코메티는 브랑쿠시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결과 초기 작품에서 바타유와 <도퀴망>의 민족지학자들이 혐오했던 원시주의에 대해 미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마송과 레리를 통해 <도퀴망>을 알게 된 자코메티는 곧바로 무정형에 대한 감각을 키우게 됐다. 무정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매달린 공」이었다. 역설적이게도 1930년에 이 작품을 처음 선보였을 떄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공은 초승달 모양의 쐐기는 애무하듯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이 성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접촉은 성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형체들의 성적 정체성은 결코 확정할 수 없다. 정체성의 유희는 바타유가 무정형성의 임무라 칭했던 분류 체계의 해체를 가져온다. 「매달린 공」이 남긴 중요한 교훈은 무정형적인 것이 뒤섞인 것이나 점액질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정형은 경계를 제거하기 떄문에 범주를 없앤다는 점에서 훨씬 구조적이다. 실제로 이런 제거가 이루어지며 효과를 내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코메티의 흔들리는 진자와 유사할 뿐 아니라, 바타유가 "(무정형적인 것은) 형태를 좌대로부터 끌어내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치리라."라고 하면서, 수직적인 것을 수평적인 것으로 평준화하는 것과도 닮았다. 1930년 자신의 조각을 수평적인 것으로 환원하겠다고 결심한 자코메티는 전에는 조각의 좌대에 불과했던 것만으로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런 발상은 그의 무정형 개념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유희가 아닌」(1933)과 같은 모더니즘 조각의 대약진은 대지미술 등을 통해 60년대에 와서야 인식될 수 있었다.
형태를 흩트리기보다 범주를 모호하게 하는 데서 발생하는 무정형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30년대 초반 잡지 <미노토르>에 게재된 두 장의 사진이었다. 첫 번째는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만 레이의 사진으로, 그는 여기서 머리 없는 모델의 몸통에 조명을 비춰 어깨와 가슴이 각각 황소의 뿔과 이마처럼 보이게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를 표현했다.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은 '불가능한' 하나의 범주 속에서 붕괴되며 머리가 없는 듯 보이는 인간의 형상은 더 나아가 형태의 상실에서 기인한 타락의 경향을 암시한다. 나머지 한 작품은 <미노토르> 창간호에 게재된 브라사이의 「누드」이다. 비관습적인 시각에서 찍힌 여성의 신체는 명백하게 남근의 형태를 암시하면서 「매달린 공」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로제 카유아는 미노타우로스만큼이나 매혹적인 무정형성의 구현체인 사마귀에 대한 가장 뛰어난 분석을 제공한 바 있다. 생명체에 대한 글에서 무정형성은 곤충이 주변 환경과 똑같이 자신을 위장하는 동물 의태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한 잎의 풀처럼 보이는 사마귀의 위장은 "죽은 척하기"의 형태를 띠며 배경과 뒤섞이는 방식으로 범주를 제거한다. 다시 말해 형상과 배경, 또는 생물체의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사마귀는 이런 제거를 단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왜냐하면 종종 다른 것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사마귀도 사냥, 산란, 둥지 틀기와 같은 삶의 의무를 이행하기 때문이다. 죽은 척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살아 있는 동안 사마귀가 하는 활동에 포함되므로, 죽은 사마귀 또한 삶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죽은 사마귀는 죽음을 모방하는 삶을 다시 모방한다. 유사성이라는 기준이 제거되면서 죽은 척하는 죽음이라는 불가능한 사례가 도출된다. 바로 바타유가 무정형적이라 했던 것, 이후에 등장할 어휘를 적용하자면 이를 허상(시뮬라크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 책 공부 > 1930년대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37년a 나치와 모더니즘 미술 (0) | 2019.10.10 |
---|---|
1935년 발터 벤야민, 앙드레 말로, 기계 복제가 미친 예술에 대한 영향 (0) | 2019.10.08 |
1931년 초현실주의 오브제, 프로이트, 자코메티, 오펜하임, 코넬 (0) | 2019.10.07 |
1930년a 바이마르 독일에 등장한 사진의 새로운 구조와 여성 사진가 (0) | 2019.10.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