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어떤 과정을 기술하거나, 계산서를 작성하거나, 또는 나무를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우린 견본을 창조해 냅니다. 이 견본이 없다면 우리는 실재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짐승과 다름없죠.
추상적 그림들은 허구적 견본입니다. 왜냐하면 그림들은 우리가 볼 수도 기술할 수도 없는 실재를 예시하니까요. 우리는 이 실재를 부정적 개념들, 즉 미지의 것, 이해 불가능한 것, 비정형적인 것을 사용해서 식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세기 동안 그려왔죠. 즉, 천국과 지옥, 신들과 악마들의 대체 이미지들을 말이죠. 추상회화는 우리가 혼란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추적하는 데 있어 보다 나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추상은 보다 직접적인 표현성-즉, 미술의 모든 수단들-을 가지고 ‘무’를 기술합니다. 우리는 회화에서 실제적인 어떤 것을 인식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변주들 가운데 있는]색을 구체적인 어떤 실체로 보기를 정당하게 거부합니다. 그 대신, 불명확한 것, 즉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전력을 다하죠. 이는 예술적인 솜씨가 돋보이는 유희가 아니라 필요입니다. 미지의 것은 어떤 것이든 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뭔가를 기대하게 하기에, 우리는 그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조금은 더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 아니면 적어도 보다 쉽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연히, 구상회화 또한 이러한 초월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최종적인 또 최초의 측면 그리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불가사의한 세계의 부분으로서 이 세계를 구현하기 때문에 구상회화 역시 회화 안에서 무든 미스터리를 구현하고 재현합니다. 묘사의 기능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 점은 보다 강력해지지요. 따라서 점점 더 강렬해지는 매력, 예를 들어 그렇게도 많고 오래되고 아름다운 그림들의 매력이 생기는 겁니다. 회화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더욱 심미적이며, 명민하게, 광적이며, 극단적으로 그리고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재현하면 할수록 회화는 보다 나은 것이 되겠지요.
미술은 희망의 최고 형식입니다. [1982]
구상회화와 비구상회화 간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없는 것 같다. [……] 둘다 ‘그림’이다. 즉,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든 간에, 그것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해서 재현한다. 그림들은 나타난다. 그림들은 재현된 무엇이 아니라, 재현된 것의 나타남이다. 이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 또한 회화에서의 환영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조금도 피해갈 수 없기도 하거니와, 실제가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것은 나타남이지 속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고 다시 구상회화와 비구상 회화가 공통으로 가지는 그 특별한 무엇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서, 그림의 두 양식 모두 기분과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흥분된 기분이든 우울한 기분이든 상관이 없다. 아마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아웃사이더보다 내가 이를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1984]
그린다는 것은 맹목적이고 절망적인 노력이다.
사람들은 나처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얼 그릴 것인지에 대한 의식, 즉 ‘주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든 뉴먼이든 도는 로스코나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중재자들, 혹은 시골 화가까지, 그 누구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하나의 주제, 즉 ‘그림’을 줄곧 추구한다.
내가 추상회화를 그릴 때 문제는 다른 분야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지도, 그리는 동안 내가 무엇을 이루고 싶어하는지도,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린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환경에서 도구도 없이 방황하는 것처럼 거의 맹목적이고 사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도구, 재료, 능력, 그리고 무엇인가 의미 있고 유용한 것을 만들려는 강렬한 열망까지 모두 갖추고 있지만, 집도, 의자도 그 어떤 이름을 가진 대상도 아닌 어떤 것을 만들려는, 그래서 정확하고 전문적인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 어떤 것,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생산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일하는 사람처럼. [1985.5.18]
내 풍경화는 아름답고,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잃어버린 파라다이스를 낭만적 또는 고전적으로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풍경화는 “진실하지 않다”[이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을 항상 알지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내가 “진실하지 않다”고 할 때, 이 말은 자연을 찬미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리킨다. 모든 형태의 자연은 늘 우리의 반대편에 선다. 즉 자연은 의미도, 동정도, 연민도 모른다. 자연은 아무것도 모른다. 자연에겐 분명히 마음이 없다. 즉 자연은 우리와 전적으로 정반대이다. 자연은 비인간적이다. 우리가 풍경화에서 보는 모든 미, 즉 모든 색조, 평화롭거나 폭력적인 배열, 섬세한 선의 네트워크, 거대한 공간 등등은 우리 자신을 투사한 결과이고, 동시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소멸시켜 소름 끼치는 추함과 기괴함을 볼 수도 있다.
자연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라서 죄를 범한다고 할 수 조차 없다. 자연은 본질상 우리가 극복하고 거부해야 할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사악함, 잔인함, 비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서 비롯 되어지는 우리가 사랑[이는 포유류의 무의식적이고 동물적인 교배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이라고 부르는 희망의 입김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겐 이것이 없다. 자연의 어리석음은 절대적이다. [1986.2.18]
물론, 나는 끊임없이 내 무능력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치있는 진정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이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알지조차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한다. 반면, 나는 항상 희망을, 어려움에 굴하지 않으면 언젠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리고 내가 갈망하는 것을 내게 상기해주는 그 무언가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실제로 생겨날 때 나는 이 희망을 또한 키운다. 물론 평범한 것만 남긴 채 사라지는 순간적인 발견들에 여러 번 속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겐 어떤 주제[motiv]는 없다. 오직 동인[motivation]만이 있을 뿐이다. 내 생각에, 동인이 진정한 것, 자연에 진실한 것이다. 주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반동적이다[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처럼 어리석다]. [1985.2.20]
나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또 유토피아란 범죄적인 것이 아니고서는 의미 없는 것이라는 체념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 가운데서 나의 사진적 회화, 색면 회화, 회색 회화가 출현했다. 그 모든 작품에 유토피아, 의미, 미래, 희망이 자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는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슬그머니 들어오는 어떤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그러니까 우리는- 빈약하고 편협하고 제한된 이해를 가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무한정 더 낫고 더 현명하며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198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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