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근대미술관에서 《인간의 새로운 이미지》전이 열린다. 실존주의 미학이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뒤뷔페, 프랜시스 베이컨, 윌렘 데 쿠닝 등의 작품에 나타난 구상에 관한 냉전의 정치로 확장된다.
재현과 추상의 투쟁은 초기 모더니즘의 역사 내내 끈질기게 계속돼왔다. 그러나 파시즘이 부상하면서 이런 지형도는 재편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 그랬다. 반나치 운동에 나선 프랑스 인민 전선 정부는 '휴머니즘'을 외치며 예술가들에게 엘리트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형식을 버리고 노동계급에 다가설 수 있는 예술을 통해 정치에 참여할 것을 중용했다. 따라서 미술에서 나타난 구상적 재현은 아카데미라는 특권에서 떨어져 나와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됐다.
상황 속의 인간
당시 알베르토 자코메니(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조각에 나타난 변형은 실존주의 미학이 완벽하게 구현된 사례였다. 전쟁의 비극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실존'(이 실존은 자신에 선행하여 자신을 규정해 줄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본질', 즉 보편 법칙이나 진리, 또는 조건의 총체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에 내던져진 인간 주체에 대한 리얼리즘을 낳았다고 한다면, 전쟁 이후의 시기는 실존주의 미학을 희극으로 바꿔 놓았다. 전후 40년대가 냉전의 50년대가 되고 마샬 플랜과 팍스 아메리카나가 도래하면서 실존주의는 문화 산업의 하나가 됐다. "상황 속의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와 함께 하나의 슬로건이 됐고, 이 두 슬로건 모두 뉴욕근대미술관이 1959년에 개최한 《인간의 새로운 이미지》전처럼 미학과 관련된 거의 모든 종류의 리얼리즘을 장려하는 데 사용됐다.
《인간의 새로운 이미지》전은 1세대 '리얼리스트'인 자코메티와 장 뒤뷔페를 내세워 중간 세대인 데 쿠닝, 폴록,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1992)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3세대 신표현주의자인 카렐 아펠, 세자르(César, 1921~), 리처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 1922~1993), 레온 골럽(Leon Golub, 1922~2004),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등을 하나의 '새로운'운동으로 선전하고자 했다. 당시엔 이미 팝아트가 회화에 진입해 있었고 구상과 표현의 관계에 관한 이런 모든 생각은 구닥다리로 여겨지고 있었다.
자코메티가 초현실주의를 포기하고 연 첫 번째 전시 카탈로그에 사르트르가 「절대의 추구」를 썼던 1948년의 미학과 《인간의 새로운 이미지》전이 열린 1957년의 미학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는 물론, 실존주의가 전후 자코메티의 작품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사르트르의 철학적 글쓰기는 바로 자코메티의 초현실주의적 영역인 꿈, 환상, 기억, 환각 같은 정신 이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됐다. 사르트르의 전체적인 철학적 입장은 '무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식할 수 있든 없든 의식 안에 감춰져 있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아 의식 자체보다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의식인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후설은 이런 의식을 "지향적 의식"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따르면 의식이란 오로지 대상을 지각하고 포착하며 대상에 정향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의식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서는 운동 즉 스스로를 비워 내는 기투이며, 배후에 아무런 '내용'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의식의 대상은 대상의 고유한 초월적 특징, 즉 의식 자체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의식과 대상이 서로의 밖에 놓이게 되면서 인간은 그에게 동기를 줄 뿐 아니라 자유를 실행할 장소이기도 한 세계와 하나가 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오로지 인간의 행위일 뿐이며, 이 행위가 세계 내에서 그가 처한 상황과 그를 통일시켜 준다. 총체화하는 종합에 대한 사르트르의 두 모델은 우선 예술 작품의 통일성과 그리고 레지스탕스와 리베라시옹이 격렬했던 시기에 나타난 일시적이지만 실재적인 집단인 이른바 "융합하는 그룹"이다. 전쟁 이후 자코메티의 조각에서 사르트르는 위의 두 모델을 모두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자코메티는 관람자가 그의 작품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든 상관없이 5미터나 10미터, 또는 그 이상으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냈다. 사르트르의 글에 따르면 "자코메티는 조각상에 어떤 상상의 불가분한 공간을 돌려주었다. 자코메티는 멀리 떨어진 인간을 보이는 대로 조각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조각이 인간으로 지각되는 만큼 , 모두 수직적인 것은 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샤르트르는 상상을 신체의 휴식과 연결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은 걷거나 공간을 가로지르거나 행동을 취하는 것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각돼 그가 속한 지각의 영역에 맞물려 있는 인간은 신체가 자신의 기투와 합일되는 하나의 종합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글에 따르면 실루엣이 "알 수 없는 미래를 그리고 있어서 이런 동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동작의 원인이 아니라 목표를 단서로 삼아야 하는 동굴벽화처럼 자코메티의 조각은 다수성을 제거시켰다. 석고나 브론즈는 여러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그러나 걷고 있는 이 여인은 나눠지지 않는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 안에서 걷고 있다. 이 여인은 전체가 한순간에 나타나기 때문에 부분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자코메티의 작품에서는 이런 지각적 통일의 효과에 "융합하는 그룹"의 느낌이 덧붙여진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르면 각각의 형상은 "하나의 상호 주관적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거리를 유지한 채 나타나는 인간을 보여준다. 인간은 미리 존재해서 나중에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 실존하는 본질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저술가들에게 자코메티의 형상이 지닌 고립성과 부동성은 '상호 주관성' 자체가 숨쉬기 힘든 분리나 고독, 심지어 공포로 보였다. 1951년 프랑시스 퐁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그리고 인간만이 실처럼 가늘어져서 폐허의 상황과 참혹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온통 얇고 발가벗은 야윈 살과 뼈, 군중들 속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자코메티의 조각이 그 물리적 주변 환경과 통합돼 있었다고 한다면, 전쟁 이후 뒤뷔페의 초상과 여인의 신체가 지닌 상처 입고 유린당한 표면은 순간적인 지각의 통일성보다는 인간 주체가 도시 폐허의 주름 잡힌 표면에 융합된 기름 자국이나 얼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뷔페는 인간에게 형태적 본질이나 안정적 존재를 부여하기는커녕 그 형태를 공격한다는 목표를 구체화했다. "내 의도는 드로잉이 인물에 어떤 특수한 모양도 주지 않아야 하며, 반대로 드로잉은 인물이 이런저런 특수한 형태를 갖지 않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뒤뷔페가 이런 인물을 만들기 위해 동원한 재고 찌르는 듯한 선들은 낙서의 모독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지향했기 때문에 신체 전체의 '훌륭한 형태'에 대한 공격을 느끼게 한다. 이런 공격은 생식기에 집착하는 낙서에서 매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뒤뷔페의 선들은 지적인 의도가 없는 낙서 자국의 반자동적 특성도 불러일으킨다.
뒤뷔페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전후의 자코메티와 함께 등장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감옥 같은 곳에 고립된 인물의 흐릿한 용모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베이컨의 인물들은 자코메티의 무감각한 인물보다 훨씬 표현적이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에 기초한 베이컨의 여러 인물들은 언제나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짓눌린 듯 보인다.
데 쿠닝이 여인의 이미지에 기댄 이유는 그것이 미리 주어져 반복할 수 있는 하나의 고정된 관습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 바 있다. "구성, 배치, 관계, 광선이 제거됐기 때문에 나는 이제 두 개의 눈과 한 개의 코, 입, 목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여인들은 홀로 있든 여럿이 있든 그 착상의 핵심부터 반복적인 느낌을 내뿜는다. 하지만 그의 여인들은 반복적 성질을 띠며 개별성이 결여돼 있는 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존주의 미학과 확실한 연관성을 지닌다고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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