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터, 메모, 1990
내가 어떤 것도 계획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그림을 ‘구축’ 하기 위해 내가 고려하는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작업수행이 만약 성공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이 수행작업의 일부가 파괴되었기 때문이거나 파손되지 않은 채 마치 비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식으로 이 작업이 그래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며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방면에 내가 불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모욕적이고, 또 이는 나의 자격과 내 창조적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비록 그게 속성상 나의 의지에 반해 스스로 만들어지며 제멋대로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그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내가 적어도 그것들이 결국은 어떻게 보일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수많은 ‘예’와 ‘아니오’에 대한 결정의 연속과 마지막 ‘예’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전체성은 내게 분명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되거나 사회적 영역과 비교하더라도 좀 더 자연스럽고 활기가 넘친다. [1990.2.12]
내게 있어 레디메이드는 실재성의 발명으로 보여진다. 즉 세계상과는 대립되는 실재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이 커다란 발견인 것이다. 레디메이드 발명 이후로, 회화는 더 이상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실재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전처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실재성의 가치를 부인하는 일이 다시 문제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1990.10.24]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점점 더 못한 존재가 되고 종말에 이른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말인 듯하다. 다시 또 다시, 이후의 세대들은 이전에 이미 달성했던 경험의 수준에 다다르기까지 수십 년을 고생해야 한다. 그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토록 비난 받는 ‘오늘날의 미술 현장’은 만약 그것이 잘못된 요구들과 비교되지 않는다면 무해하며 호의적이다. 이 현장은 우리가 떠받들고 [또는 우리를 드높이는] 전통적인 가치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미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미술현장’은 비열하지도 냉소적이지도 정신을 결여하지도 않는다. 일시적으로 번영하며 바삐 상징하는 현장으로서 그것은 스포츠 패션, 우표 수집 또는 고양이 기르기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불멸하는 일종의 사회적 게임의 변주일 뿐이다. 이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발생한다. 드물게 그리고 항상 뜻밖에, 결코 그럴 듯 않게. [199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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